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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예술가의 옛집
2019-07-13 08:01:13최종 업데이트 : 2019-07-13 08:01:13 작성자 :   연합뉴스

[문화유산] 예술가의 옛집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서울 한복판에서도 궁궐을 둘러싼 주변은 산업화 시대 개발의 광풍이 비껴간 동네다.
편리한 차가 짐이 되는 좁은 골목은 천천히 걷기 좋고, 곳곳에 오랜 세월과 이야기를 품은 집들이 남아있다.
오래전부터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터를 잡고 사랑한 동네이기도 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를 걷다가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옛집을 들러보자.



◇ '문을 닫으면 이곳이 깊은 산중'…성북동 최순우 옛집

한양도성 북쪽 동네 성북동. 산업화 시대,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도심과 가까운 이곳으로 모여들어 서울 최고의 부촌과 마지막 남은 달동네가 여전히 공존하는 곳이다. 고만고만한 상가와 빌라들이 늘어선 골목에 단정한 한옥 한 채가 있다.
큰길 바로 뒤로 난 이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면, 이 집을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외관은 물론이거니와, '최순우 옛집'이라는 간판과 문화재(등록문화재 제268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발길을 붙들 것이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설파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대중에게도 유명한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인 최순우 선생(본명 희순, 1916∼1984)이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돌계단 예닐곱개 높이의 축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이 집은 1930년대 지어진 근대한옥이다.
사랑방과 안방, 대청과 건넛방이 있는 본채가 'ㄱ'자 모양으로, 현재 전시실로 쓰고 있는 바깥채가 'ㄴ'자 모양으로 마주 보고 있다. 가운데 안뜰을 품고, 두 귀퉁이가 트여 있는 'ㅁ'자 형이다.
선생의 서재인 사랑방 문 위에는 최 선생이 이사 오던 해 직접 써서 건 현판이 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다.
돌계단을 올라 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도, 사랑방을 돌아 뒤뜰을 마주했을 때도 '이런 곳에 이런 집이!' 하고 감탄했던 이유가 바로 저 여섯 글자가 의미하는 바와 딱 맞아떨어졌다.



남쪽으로 난 뒤뜰은 석벽으로 막혀 있지만, 안뜰보다 훨씬 널찍해서 해가 잘 든다.
그곳에는 값나가는 정원수 대신 작살나무, 신갈나무, 소나무, 감나무, 자목련, 단풍나무, 밤나무, 모과나무, 생강나무, 산수유, 산수국, 대나무, 비비추, 원추리, 상사화, 머위, 바위취, 옥잠화 같은 친숙한 꽃과 나무들이 제법 울창하다.
사람 모습을 새긴 동자석과 문인석, 벅수부터 우묵하게 패여 빗물을 받거나 장식으로 두는 돌확, 향로를 놓아두는 향로석이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장독대 앞에 돌로 만든 널찍한 원형 테이블이나 신갈나무 아래 돌 벤치에는 최순우 선생의 저작과 동화책이 놓여 있다.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무 아래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펼쳐 들고 선생이 사랑했던 것들, 주변의 작고 아름다운 것들에 찬찬히 눈길을 둔다.



사랑방의 뒤뜰로 난 문에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걸려 있다. '오수당'(午睡堂), '낮잠 자는 방'이다.
단정한 고가구와 서책으로 꾸민 사랑방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나 용자살 미닫이문 너머로 뒤뜰을 바라보는 선생의 마음을 툇마루에 앉아 짐작해본다.
선생은 완(卍)자 창살이 잔재주를 부린 것이라면, 용(用)자 창살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췄다며 칭송했다.
사랑방 바로 앞 향로석 위에 또한 사랑해 마지않던 백자를 올려놓고 감상했다니, 그 고아한 사치가 너무너무 부럽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15길 9
4∼11월, 화∼토요일, 10∼16시. 추석 당일 휴관
관람요금 무료
☎ 02-3675-3401∼2



◇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지은 집…성북동 '심우장'

성북동 작은 언덕에 올라앉아 있는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1933년 직접 지어 입적 때까지 머문 집이다.
서울특별시 기념물이었던 심우장은 지난 4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550호로 지정됐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널찍한 마당이다. 마당 한쪽 끝에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도 있지만, 대문에서부터 마당 안쪽까지 가지를 넓게 드리운 소나무가 더 인상적이다.
1930년대 서울이 확장하면서 성북동 일대는 주거지로 개발됐는데, 심우장은 정면 4칸의 작고 소박한 규모다.
대지의 남쪽에 자리 잡은 집은 대청 두 칸에 온돌방 한 칸, 뒤로 찬마루 한 칸이 딸린 부엌 한 칸이 전부다.
조선총독부를 바라볼 수 없다며 동북쪽을 향하고 있다.
한용운은 심우당에 정착해 결혼한 뒤 낳은 딸이 일제의 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며 직접 가르쳤고,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소설을 썼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인 일송 김동삼(1878∼1937)의 장례가 이곳 심우장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인 김동삼은 하얼빈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수습하지 않은 그의 주검을 한용운이 수습해 온 것이다.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 현판이 걸려 있다. 초서의 대가로 알려진 서예가 일창 유치웅(1901∼1998)의 글씨다.
'심우'는 불교의 선종에서 10단계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을 소를 찾는 동자에 비유한 그림에서 따온 말이다. 그 아래 툇마루가 이곳의 명당이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9∼18시
관람요금 무료
☎ 02-2241-2652

[함께 둘러보면 좋은 곳]
▲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최순우 선생의 필명 '순우'와 호 '혜곡'을 지어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겸재 정선과 신윤복, 김홍도의 그림 등 중요문화재를 소장한 간송미술관이 걸어서 10분 거리다.
▲ 간송미술관, 심우장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있는 찻집 '수연산방'은 성북동을 돌아보고 쉬었다 가기 좋다. 당대의 문장가 상허 이태준(1904∼?)의 집으로, 그의 외종손녀가 조금 고쳐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직접 지은 당호다. 이태준은 이 집에서 단란한 가족을 꾸렸고 많은 작품을 써냈다. 그가 좌장 역할을 한 문인 모임 '구인회'의 아지트이기도 했을 테다.



◇ 처음 모습 그대로 만나는 이상의 작품…통인동 '이상의 집'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이상의 집은 일제 강점기의 천재 시인이자 화가, 건축가인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터의 일부에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다.
소생이 없던 큰아버지 김연필이 두 돌이 지난 이상을 데려와 20년 넘게 이곳에서 키우고 공부를 시켰다.
300평에 달했던 김연필의 집 통인동 154번지는 이후 여러 필지로 나뉘어 팔리고, 154-10번지에 남은 건물도 헐리게 될 위기에 처했던 것을 지역 사회에서 지켜냈다.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가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매입해 이듬해 문화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해 4개월에 걸친 보수 공사를 마치고 12월 다시 문을 열었다.
근대문화재 등록이 취소된 건 이 집이 이상이 사망한 뒤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어서다.
시인이 실제 살았던 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그 대신 이상의 작품과 자료를 한데 모으고, 작품 속 공간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설치해 그의 작품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했다.



새롭게 선보이는 이상의 작품 아카이브가 신선하다. 팔만대장경처럼 나란히 꽂혀 있는 두툼한 아크릴판을 꺼내면 이상의 시가 처음 신문에 실렸던 지면이 그대로 인쇄돼 있다.
수필이나 소설 등 길이가 긴 작품은 쉽게 훼손되지 않는 도톰한 필름지에 인쇄해 철로 엮어 트레이에 한 부씩 담겨 있다.
잡지 '조광'에 발표한 대표작 '날개'의 첫 페이지에서는 이상이 직접 그린 삽화 역시 같이 볼 수 있다.
아내가 준 약, 아스피린(해열제)인 줄 알고 주인공 '나'가 먹었던 최면약 상자 전개도와 6개의 알약이다. 알약 하나하나에는 자신의 이름을 영문 알파벳(RISANG)으로 새겨 넣었다.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 구보 박태원(1909∼1986)이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그렸던 삽화도 볼 수 있다.
한자와 일본어가 섞여 있고 세로쓰기에 한글마저 지금과는 다른 낯선 표기법 때문에 읽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서 시 한 편, 소설 한 편에서 더 나아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언제든 와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다.



아카이브 바로 옆에 걸린 이상의 컬러 사진에 깜짝 놀랐더니, 극사실주의 작가 정중원이 23살 건축사 시절의 이상의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다. 지난 4월 시인의 기일에 맞춰 새로 걸었다.
안뜰에는 조각가 최수앙이 제작한 흉상도 설치됐다. 이상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1906∼1953)이 그린 19세 무렵의 이상의 초상화를 참고해 만들었다.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은 이어령이 초대주간을 맡은 '문학사상' 창간호(1972년 10월) 표지에 실린 '친구의 초상'이 유명하다.
요절하기 2년 전인 1935년, 구본웅이 담은 이상의 모습은 치켜 올라간 눈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기인 같은 모습으로, 이것이 이상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해설을 청하면 흑백 사진 속에 담긴 이상이라는 필명의 탄생 비화도 확인할 수 있다.
육중한 철문 너머 2층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은 소설 '날개' 속 공간을 형상화했다. '영영 해가 들지 않는 윗방'이라고 했던 '나'의 방은 계단으로만 이루어진 좁고 깜깜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이상의 일대기를 간략히 소개하는 영상물이 상영된다.
계단을 오르면 1층 한옥의 지붕과 중정이 내려다보이는 아주 작은 테라스가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나'가 살아온 스물여섯 해를 돌아보던 미쓰코시(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 옥상이다.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매일 10∼18시(12∼13시 점심시간), 설·추석 연휴 휴무
관람요금 무료
☎ 02-752-7525



◇ 친일파의 문화주택에서 미술관으로…옥인동 박노수 가옥

남정 박노수(1927∼2013) 화백이 40년 가까이 살던 집이다.
박 화백이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거주했고, 말년에 미술관 설립을 위해 종로구에 기증했다. 2013년 2월 박 화백이 타계하고 같은 해 9월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으로 문을 열었다.
고만고만한 빌라와 주택이 대부분인 옥인동에서 이 집은 단연 눈에 띈다.
1층은 벽돌조, 2층은 외벽을 흰색으로 칠한 목조 건물로 붉은 창틀과 서까래가 도드라지고, 박공지붕에는 굴뚝이 여러 개 솟아있다.
건물 입구에는 아치형 포치가, 현관 옆 응접실과 2층 방에는 벽난로가 설치돼 있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과 밥을 먹는 식당이 분리돼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서구식 주택의 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은 이른바 문화주택이다. 온돌방 등 한식과 서구식이 주로 섞였지만, 중국이나 일본풍도 엿보인다.
이 흔치 않은 집을 지은 건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다. 경술국치 당시 조카인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감추고 있던 옥새를 빼앗은 인물이다.
일제의 작위를 받은 그는 옥인동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인왕산 중턱에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서구식 저택 '벽수산장'을 지었다. 그 주변으로 일가들을 위해 여러 채의 집을 지었고 그중 하나가 딸을 위해 지은 이 집이다.
집은 이후 오랜 세월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며 풍파를 겪었다. 박 화백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를 회고하며 "폐허와 같았다"고 했다 한다.
이후 마당에 돌과 나무, 석등과 향로석, 돌확 등을 들여놓고 날마다 하루 두 시간씩 손수 가꾸어 '친일파의 집'을 지우고 '박노수 가옥'으로 만들었다.
집 뒤로는 자귀나무와 대나무, 앵두나무, 산수유나무가 무성한 작은 동산이 있고, 박공지붕 너머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도 설치돼 있다.

서울시 종로구 옥인1길 34
화∼일요일 10∼18시, 1월 1일·설날·추석 휴관
관람요금 3천원(성인)
☎ 02-2148-4171



◇ 최초의 서양화가가 직접 설계한 개량한옥…원서동 고희동 가옥

한국 최초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이 직접 지어 40여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10대 때 역관 양성 학교인 한성법어학교를 다니며 서양화를 접한 고희동은 190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서양 유화를 배웠다.
1915년 귀국 전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으로 문화재(등록문화재 제487호)가 됐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1918년 직접 설계해 지은 이 집은 몇 차례 증개축을 거치며 1950년대에 현재 복원된 모습으로 완성됐다. 한옥이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길고 좁은 복도와 유리문이 일본의 목조가옥을 떠올리게 한다.
일자형 안채에 'ㄷ'자형 사랑채가 붙었는데, 'ㅁ'자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서리 부분인 화실과 사랑방이 안뜰 가운데 들어와 자리 잡았다.
안채의 기단이 사랑채보다 높아 계단으로 연결돼 있고, 휑하다 싶게 널찍한 앞마당에 비해 안뜰은 좁고 답답한 편이지만, 특이한 구조 덕에 탐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화백이 말년에 이사하고 집주인이 바뀌며 2002년 초반 헐릴 위기에 처했던 것을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가 보전 운동을 벌여 지켜냈다.
2004년 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고 2008년 종로구에서 매입해 복원과 보수 공사를 거쳐 2012년부터 개방됐다.
사랑채에 있는 화실과 사랑방은 실제 화백이 사용했던 가구나 물품이 아니라 모두 재현을 위해 사들인 것들이다.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40
화∼일요일 10∼18시, 1월 1일·설날·추석 휴관
관람요금 무료
☎ 02-2148-4165



[함께 둘러보면 좋은 곳]
▲ 박노수 미술관에서 나와 필운대로를 따라 내려가면 누하동에는 소정 변관식과 함께 근대 한국화단의 두 거장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1897∼1972)의 가옥과 화실(등록문화재 제171호)이 있다. 박노수 화백 역시 이곳에서 청전을 사사했다. 1930년대 도시형 한옥으로, 이 화백은 43년 동안 이곳에 살며 작품활동을 했다.
▲ 이상범을 사사한 화가 제당 배렴(1911∼1968)이 말년을 보낸 '배렴 가옥'(등록문화재 제85호)은 고희동 가옥 근처 계동에 있다. 2017년부터 일반에 개방해 한국화의 전통을 잇고 알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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