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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집】 등기소 창고에 몰아넣고 불질러
'인민위원' 완장 채워주자 제 세상 만난듯 설쳐…머슴이 자기 주인도 잡아들여
2019-06-06 14:55:45최종 업데이트 : 2019-06-19 10:56:23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일은 현충일이고 25일은 69년전 조선인민군들이 한국을 기습 남침한 날이다.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은 국민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참전 용사들은 다들 90세가 넘어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이 많으니 전쟁 영웅담을 듣기는 여의치가 않다. 지금은 70여년전 전란의 참상을 증언할 유일한 세대는 80대들 뿐이다. 기자가 69년전 기억을 더듬어 어릴적 겪었던 6.25의 참상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일성(중앙)스탈린(우) 모택동(좌)의 남침 모의로6.25 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중앙) 스탈린(오른쪽) 모택동(왼쪽)의 남침 모의로6.25 전쟁을 일으켰다. 사진/용산전쟁기념관
 

6.25 전쟁은 조선 김일성,소련 스탈린,중국 모택통의 합작품이다. 6.25 전쟁(50.6.25)은 휴전(53.7.28)하기 까지 3년이 걸렸지만 6.25 발발후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50.9.27)하고 인민군이 후퇴하기 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 3개월동안 대구,부산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은 조선인민공화국 치하에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 동안에 겪어야 했던 고통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납북되거나 억울하게 학살 당한 피해자들이 많았다.       
                                                                   인민군의 치하의 점령지역 (검정부분) 국군의 대구,부산 방어선 지역(하얀부분). 사진/용산전쟁기념관

인민군의 치하의 점령지역 (검정부분) 국군의 대구,부산 방어선 지역(하얀부분). 사진/용산전쟁기념관

미군 대표 와 인민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용산전쟁기념관

미군 대표 와 인민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용산전쟁기념관

 

기자(82)의 고향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이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5학년 13살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어른들이 인민군이 쳐들어와 서울이 난리가 났다고 웅성 거린다. 그 시절에는 라디오를 갖고 있는 집도 드물었다. 유일한 정보는 라디오를 갖고 있는 사람이 뉴스를 듣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난리 났다는 소리를 들은지 얼마 안되어 우리 면에도 인민군들이 들어 닥쳤다. 지서를 내무서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이 내무서에 상주했다.

 

인민군은 우리들은 소년단에 가입하게 했으며 매일같이 소집해 중학교에 다니는 선배 형들로 부터 노래를 배우게 했다. 학교는 휴교 했지만 매일 불려가 운동장  나무 그늘 아래서 김일성 장군 등 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빨치산 노래를 배웠다. 얼마를 불러 댔는지 69년이 흐른 지금도 그 가사가 생각난다. 바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김일성 장군' 노래다.

 

면에 인민위원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조직 되었다. 인민위원들은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나 가난에 찌들어 살던 글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감투를 씌워주고 충성심을 유발시켰다. 하얀 헝겁에 빨간 글씨로 '인민위원회'라고 쓴 완장을 왼팔에 두른 이들은 죽창을 들고 3~4명씩 짝을지어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파주 임진각공원에 전시된 증기기관차가 한국전쟁의 처참함을 상징하고있는 듯하다.

파주 임진각공원에 전시된 증기기관차가 한국전쟁의 처참함을 상징하고있는 듯하다. 사진/무료이미지 사이트 픽사베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면장이나 기관장을 지낸사람들 군인가족들, 경찰가족들, 지방유지인 소방대장, 양조장주인,약방주인, 농토가 많은 부자집 주인 등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있는 관료들이나 지역 유지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다. 평생을 이들에게 굽신거리고 살줄 알았던 사람들이 완장을 두르고 인민위원 이라는 감투를 씌워 주니 대단한 우월감을 갖고 행세를 했다. 머슴살이 하던 일꾼이 주인을 잡아들였다. 같은 면, 이웃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자  돌변한 것이다.  자생적 공산당원인 이들은 일명 '빨갱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눈에 거슬리면 보복을 당한다. 인민군보다 빨갱이들을 더 무서워하고 두려워 했다. 인민군들은 밤이면 주민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면서 주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면서 낮에는 인민위원들을 시켜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인민위원들은 그들의 정보원이고 내무서원(경찰)역할을 했다. 인민 위원들이 사람들을 잡아 포승줄로 굴비 엮듯 한줄로 묶은채 끌고 오면 철부지인 우리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듯 줄줄이 따라 다니며 구경을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내무서에 잠시 대기 했다가 차에 태워 어디론가 보냈다. 그후로는 가족들도 소식을 알길이 없다. 기자가 40대 초반이 되었을때  불길 속에서 살아나온 황인봉(한산면 여사리)씨라는 어른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황씨는 마을에서 농사를 많이 지어 부자에 속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인민위원들에게 이유도 모른채 잡혀와 군 내무서(경찰서)로 넘겨졌다. 이후 나무로 지은 등기소 창고에 몰아넣고서 밖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창고 속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사가 일어났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다. 황씨는 하늘이 돌봤는지 불길 속에서 탈출해 논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가을이라 벼 사이에 숨어 하루종일 엎드려 있다가 밤이되어서야 20Km를 맨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땅굴 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인민군이 후퇴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후 황인봉씨는 농협 조합장을 지내기도 했다.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로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진/무료이미지 사이트 픽사베이
 

그뿐만 아니다. 면 경계선을 넘는 일명 돼지고개가 있다. 잡아온 수십명의 사람들에게 산속에다 길게 호를 파게한 후 팔을 뒤로 묶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굴비 엮듯 일열로 엮어 세웠다.  인민군들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향해 일명 따발총(36연발)으로 사격을 했다. 사람들이 호 속으로 쓰러지자 그대로 매장 시켰다. 전쟁 포로는 죽이지 않고 비무장한 민간에게 사격을 해서는 안된다는 국제 전쟁 기준도 무시한 학살 행위였다. 유엔군이 인천 상륙을 하자 후퇴를 하면서  인민군에게 협력한 지방 빨갱이들에게 보복할까 봐 자행한 악행이다.
                                                                                                                                                                                       사람들을 수시로 잡아들이니 40~50 대 어른들은 인민군들의 노무자로 끌려 가거나 인민위원들의 보복이 있을까 두려워 피난을 갔다. 기자의 아버지도 찹쌀을 1말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부대에 담아 멜빨을 메고 차가 없던 시대라 걸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구로 피난길을 떠나셨다. 기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라 아버지는 영영 못 돌아오시는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피난을 떠나시고 안계시니 어린 마음이라도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다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밥을 굶는건 예삿일이고 쌀을 구해도 식구들이 많으니 쌀 한줌에다 시래기를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멀겋게 죽을 쒀 밥을 때우는 집이 많았다. 그나마 먹을게 없는집은 양조장에 가면 막걸리를 거르고 버리는 술 지게미를 얻어다가 밥대신 먹고 가족들이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자는 집들도 있었다. 필자도 동생들이 다섯명이나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집을 떠나셨으니 13살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살아갈 길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국민학교 같은반 친구네 아버지가 엿방을 했다. 엿장사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어린 동생들과 살수있다는 생각으로 엿방을 찾아갔다. 1000원에 엿 15 가락이었는데 5할 장사였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1000원을 타서 엿을 산 후 목판에 담아 장터로 나갔다. 다 팔면 500원을 번다는 생각 뿐이다. 점심을 굶고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앉아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서야 겨우 본전을 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팔다 남은 엿을 갖고 집에오니 동생들이 엿을보고 먹고 싶은지 내 눈치를 본다. 내일 팔아야 500원을 벌수 있지만 동생들이 안쓰러워 하나씩 나눠주니 그렇게 좋아들 한다. 전쟁통에 졸지에 소년 소녀 가장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는 대전까지 가셨다가 인민군들이 후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 돌아 오셨다.
 

전쟁은 군인들만 싸우다 죽고 살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자가 보고 들은것 처럼 남과 북은 이념의 분단으로 적이 되어 생사를 가르는 전쟁을 했다. 6.25 전쟁은 우리 국민들에게 두번다시 있어서는 안될 역사적 교훈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정치인들이나 사회단체들은 좌우로 갈라져 이념 전쟁을 하고있다. 선혈들의 호국정신과 희생으로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풍요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은 머리숙여 영령들을 추모하고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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