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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은 있어도 사람은 해치지 않았지"
조원동 금당골 노인정 사무장 이필재 할아버지 마을이야기
2018-08-28 20:36:52최종 업데이트 : 2018-09-14 11:24:2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효임
여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안개가 자욱했던 28일, 금당골 노인정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언젠가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운영하는 조원1동 어린이 기자단과 함께 조원동의 구석구석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나섰던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조원동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원동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장 오래된 노인정인 금당골 노인정을 찾아갔었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그렇게 알게된 이필재 할아버지(76세)는 조원동에서 평생을 살아서 모르는 것이 없는 이야기꾼 할아버지였다.
수줍어 하시면서도 조곤조곤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셨던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더운데 늙고 보잘 것 없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느냐"며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주시는 할아버지를 아이들은 잘따르며 재미있게 대화도 나누었다.

다시 방문한 이날, 사전 약속을 위해 전화를 해도 할아버지는 전화도 받지 않으시고 문자를 남겨도 연락이 없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덜컥 걱정이 앞섰다.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금당골 노인정을 방문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맞아주신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 마냥, 앞으로도 그렇게 누구라도 반갑게 맞아주실 것처럼.

할아버지는 금당골 노인정 사무장으로 매일 노인정에 나오신다고 한다. 이날 핸드폰은 집에 고이 모셔두었다고.
집안 대대로 조원동 금당골에서 살아온 이필재 76세 할아버지를 금당골노인정에서 만났다.

집안 대대로 조원동 금당골에서 살아온 이필재 할아버지를 금당골노인정에서 만났다.

 
조원동 금당골 노인정

조원동 금당골 노인정

이 씨 할아버지는 집안 대대로 조원동에서 살았다. 여주 이 씨가 할아버지의 본관이다. 이성계의 관직도 거부한 이고 선생이 바로 여주 이 씨이고, 수원공고 학교재단도 여주 이 씨가 중심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조원동 터줏대감으로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평생을 살았다.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예전에 조원동은 어떤 곳이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질문에 할아버지는 기억속의 어린 시절을 한 꺼풀 씩 꺼냈고 그때마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곁에서 옛날 조원동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여기는 집이 없는 논바닥이었고 허허벌판이었어." 할아버지 집은 조원초등학교 정문 쪽이었는데 당시 10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고 '금당골' 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집 뒤쪽 주공아파트 쪽으로는 모두 산이고 밭이었는데 한쪽에는 연마재공장이 있었고 '돌미'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임광아파트는 '주안말'이라고 했다고 한다.

 "돌미면 돌이 많아서 돌미라고 했나요?" 호기심에 물어보니 그건 모르겠다며 웃는다. 하지만 금당골은 금이 많이 나와서 금당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난 7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오늘처럼 비라도 오면 발이 푹푹 빠지고 물이 고여서 이쪽으로는 택시도 오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릴 적 파장초등학교까지 근 4km를 1시간 정도 걸어서 다녔는데 비나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고 깊어서 가다가도 되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했지만 조원동 한일타운은 죄다 논이었다. 
굵은 대추알이 주렁주렁

굵은 대추알이 주렁주렁

지금의 벽산아파트 자리는 육군병원이 있었고 지금도 보훈지청이 위치한다. 상이용사들이 시골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아서 상이용사 자녀를 위해 기술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했던 곳이 영화초등학교가 되었으며 그들을 위해 보훈복지타운이 생기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조원시장 새마을 금고 뒤는 전부 바위산이었고 그 고개를 망주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영산공원, 영화초등학교 뒤, 종합운동장, 야구장까지는 전부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산업도로도 나고 많은 건물이 생겨나서 옛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역말(지금의 영화동)에 시장을 보러 갔다가 종합운동장 쪽(공동묘지) 고개를 지나 돌미, 주안말, 금당골로 오는 길은 어수룩한 저녁이 되면 두려움의 길로 변한다고 회상했다. 

6.25 때는 수많은 시체를 트럭으로 실어다 망주고개 움푹 패인 골짜기에 버려, 나중에 백골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한번은 동네 어르신이 쌀을 소잔등에 싣고 역말로 시장에 갔다가 팔고 막걸리를 거나하게 한잔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깨비불을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술김에 그 도깨비불을 잡겠다고 소도 버리고 잡아 가지고 와서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깨진 병의 주둥이였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6.25 때 당시 8살이었던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나중에 1.4 후퇴때 어른들을 따라서 부모님과 4살 난 여동생과 함께 용인 신갈까지 피난을 왔다. 

전쟁을 피해서 용인 신갈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신발이 요즘처럼 튼튼했던 것도 아니고 고무신을 신고 떠나는 피난길에서 8살 오빠와 4살 여동생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겪었다. 신갈 방죽은 물살이 거센데다 깊고 위험해 보였는데 8살 자신은 무사히 건넜지만 어린 여동생은 못 건너더라는 것이다. 동생과 떨어지면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위험한 상황에서 동생의 손을 힘껏 잡아 올렸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여동생이 건너지 못할까 봐 초조해하던 그때를 생각하며 목소리가 축축해지기도 했다. 그 위험했던 방죽에서 동생을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그 방죽을 건널 때의 두려움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며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함께 피난을 왔던 여동생은 지금 경남 고성에서 잘 살고 있다. "참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 할아버지는 옛 생각에 잠기면서 혼잣말을 한다. 

그렇게 집을 떠나 고생을 하고 집에 20일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피난민들이 주인 없는 집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집안 안채와 사랑채 마구간까지 모두 피난민들이 집을 장악하고 있었고 주인이 와도 안방을 내주지  않았다. 

서울 파주 문산 등지에서 온 피난민은 단 20일 만에 집 안에 있던 먹거리를 자신들이 주인인 양 먹어 치웠으며 뒤뜰에 농사지어서 묻어 둔 큰 드럼통(쌀2가마 정도)까지 찾아서 모두 꺼내먹었더라고 했다. 간신히 주인임을 인정받고 안방을 되찾긴 했지만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살았던 날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모여서 소일거리로 그림맞추기 중이신 어르신들

모여서 소일거리로 그림맞추기 중이신 어르신들

지금의 경기대학교 정문 연무동은 집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먹을 거리가 없었던 때라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 도둑이 횡횡했는데 살만 먹고 머리며 꼬리 뼈 등은 내 팽개치고 도망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그렇게 소도둑놈들이 먹고 버린 소머리와 뼈 등을 주워서 지게에 지고 왔는데 한 며칠을 집에 머물렀던 피난민과 함께 끓여서 나눠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봄이 되자 각자 되돌아갔다.

"그땐 도둑놈은 있어도 사람 죽이는 일은 없었어. 모두 배가 고파서 그랬지." 이씨 할아버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그때를 떠올리며 회한의 미소를 지었는데 자기 집을 빼앗긴 억울함보다 모두 같이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적 아픔을 함께한 동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모두가 딱한 사정이었던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보듬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참 훈훈하고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예전에 조원동에는 대추나무 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추나무와 참죽나무가 흔했고 산이 깊어서 아름드리나무가 많았지만 개발되면서 지금은 전부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기억처럼 아직까지 조원동 곳곳에는 대추나무가 많이 있다. 금당골 노인정 앞마당에도 옹골지게 둥그런 대추 알이 달린 대추나무가 서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금당골 노인정 어르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금당골 노인정 어르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노인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금당골 노인정은 조용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창고 같았다. 무더위가 지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금당골 노인정에는 십여 명의 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모여 수다도 떨고 밥도 해서 먹는 쉼터 역할을 하면서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당에는 대파가 푸르게 자라고 푸릇푸릇한 대추 알도 이제 붉게 익어갈 것이다. 
금당골 마당 가득 심어놓은 대파

금당골 마당 가득 심어놓은 대파

이 씨 할아버지의 기억 속의 그곳 조원동은 가난했지만 참 행복했을 것 같은 생각이 막연하게 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조원동도 행복한 마을,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는 마을로 만들어 먼 훗날 기억했을 때 힘들게 살아왔지만 '그때가 참 좋았지'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자주 찾아와 뵈야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오는 길에 하얀 아지랑이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금당골, 조원동,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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