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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내 장승제 이어 산제당제 열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전통 이어가…주민 화합‧소통 역할
2018-11-09 12:43:32최종 업데이트 : 2018-11-15 19:05:18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 8색길 중 효행길이 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을 참배하러 가던 길로 정조대왕의 효심을 기리는 길이다. 이 길은 지지대고개에서 시작해 노송지대를 따라 장안문, 팔달문을 경유해 매교다리를 건너 정조사거리 방향으로 이어지고 화성시 경계까지 계속된다. 

원래 정조대왕이 행차하던 이 길을 필로(蹕路)라고 한다.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까지 43리 길인데 당시에 길이 갈라지는 경계지점마다 그 지명을 표석(標石)에 새겼고 5리마다 장승(長栍)을 세웠다. 1801년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와 1831년 편찬된 화성지 기록을 종합해보면 표석이 20곳, 장승이 11곳에 세워졌다. 오늘날 장승은 모두 없어졌고 표석은 수원시에 괴목정교, 상류천, 하류천, 화성시에 안녕리, 만년제 표석 등 5개만 남아있다.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이 길은 도시화와 군 공항이 들어서면서 원래 정조대왕이 행차하던 길과는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오늘날도 현륭원까지 이어지고는 있다. 현륭원을 참배하기위해 화성행궁을 나선 정조대왕은 팔달문, 매교, 상류천, 재간현, 하류천, 황교, 옹봉을 거쳐 현륭원으로 갔다. 수원화성문화제 기간에 재현하는 정조대왕 능행차도 이 길을 따라 현륭원까지 간다.

팔달문을 지나 매교다리를 건너 정조사거리 가기 전 오른쪽에는 상류천(上柳川) 표석이 있다. 원래 제자리는 아니지만 이 근처에 있던 것이고 상류천 표석이 있던 자리에는 장승도 있었다. 그 주변인 재간현, 만화현, 건장동에도 장승이 있었는데 현재 정조사거리 부근이다. 정조대왕 행차 이후인 1825년에 상류천 주변 왕의 행차로인 필로가 바뀌어 특히 상류천 표석 주변에 장승이 많이 있었고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기도 하다.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정조사거리(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147-2)에는 '버드내 대장군 버드내 여장군' 안내간판이 서있다. 현 수원시 권선구 세류3동은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 버드내라고 했다. 버드내에는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민속자료가 전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장승이라고 한다. 장승은 지역의 경계를 표시하면서 이정표 기능을 담당했으며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백이라 했다.

"우리마을은 장승이 섰던 곳(현재 성원아파트 뒤편)을 장승백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복원하기 위하여 버드내 마을 정체성 살리기 사업을 전개하면서 '버드내 대장군과 버드내 여장군'을 이 자리에 세우게 되었다"며 버드내 주민들은 버드내의 옛 전통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며 이웃을 사랑하고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새롭기를 바라며 장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세류3동 버드내 장승제

지난 8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후 3시 30분에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돼 '버드내 장승제'를 지냈다. 풍물패가 길놀이를 하고 곧바로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제는 절차를 간단히 해 금방 끝났다. 제를 지내는 옆에서는 천막을 쳐놓고 부녀회원들이 음식봉사를 하고 있었다. 장승제를 통해 동네 사람들이 한 번 더 모이고 화합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장승제를 마치고 오후 5시에는 버드내 산제당(세류동 156-62)에서 '산제당제'를 지냈다. 버드내 산제당은 옛날부터 수원시의 대표적인 마을 제당 중의 하나로 수원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윗버드내(세류3동)의 산제당에서 벌어지는 마을 공동의 제의는 '당제', '당제사', '산신제', '산제사'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래 당집의 훼손이 심해 1956년 중건했다가 2007년 7월 10일 현재 모습으로 중건해 매년 당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류3동 버드내 산제당

세류3동 버드내 산제당

'버드내 산제당제'는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11월 8일) 저녁에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 및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제의이기도 하다. 현재 장승제와 함께 마을 대동제의 의미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도심 속에서 해체되어 가고 있는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고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다.

장승제가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 의식을 복원해 도심에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자체와 마을에서 장승제를 지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장승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장승제가 언제부터 기원되었는지 역사적 배경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세류3동 버드내 산제당제

세류3동 버드내 산제당제

조선시대 고문서를 검색할 수 있는 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규장각 등에서 장승(長栍)을 검색하면 많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장승제(長栍祭)'라고 검색하면 단 한건의 결과물도 없다. 우리 역사에서 장승은 있었지만 장승제는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민속신앙사전은 장승제(長栍祭)를 '장승을 세울 때 또는 세워진 장승을 향해 마을공동체의 벽사진경을 기원하는 제의'라고 정의하며 장승제의 대상인 장승이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고려의 장생표(長生標), 장생표주(長生標柱), 장생표탑(長生標塔), 국장생(國長生), 황장생(皇長生) 등이라고 설명한다.
정조사거리 근처 효행길에 있는 상류천 표석, 화성지 기록에 의하면 과거 상류천에는 표석과 장승이 함께 있었다.

정조사거리 근처 효행길에 있는 상류천 표석, 화성지 기록에 의하면 과거 상류천에는 표석과 장승이 함께 있었다.

태종 14년(1414)에 '도로의 식수(息數)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척(尺)으로 30리(里)를 계산해 대후(大堠)를 설치하도록 했고, 10리 단위로는 소후(小堠)를 세웠다. 경국대전(經國大典, 1485년)에서는 여기에 그 이수(里數)와 지명(地名)을 새겨 넣도록 하는 한편 대후의 설치와 함께 역(驛)을 두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장승(長性)은 장생(長生), 장승(長丞), 장승(長承), 후(堠) 등으로 혼용했다.

장승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보면 장승은 단순히 길가에 세워져 현재 마을 이름과 위치, 이웃 마을의 이름과 거리나 방향을 표시한 순수한 이정표였다. 오늘날 교통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민속신앙적 요소는 없었다. 효행길에 세워진 11개의 장승이 5리마다 길가에 세워졌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장승이 순수한 이정표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장승인데, 1890년경 인천시 만수동 별리고개 장승배기에서 뽑아간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승이다. 장승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이정표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장승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장승

'自仁川官門十里 地名星峴 西距濟物浦二十里 東北距京城六十里(자인천관문십리 지명성현 서거제물포이십리 동북거경성육십리), 장승이 세워진 위치는 인천 관문으로부터 10리 이며, 지명은 성현(현재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에서 부평구 일신동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위치한 고개), 서쪽으로 제물포까지 20리, 동북쪽으로 경성까지 60리'라고 표기했다.

1884년 우편제도 도입과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이정표로서의 장승이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갔는데 마을의 수호신인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장승과 혼용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법수(法首)나, 장신(將神) 등으로 불렸던 것인데 문화적으로 열등의식을 가진 일제가 장승을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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