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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로소이다’노작 홍사용 이야기
김우영/시인, 언론인
2018-08-23 10:23:05최종 업데이트 : 2018-08-23 10:29:14 작성자 : 편집주간   강성기
수원이 자랑하는 예술인 가운데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를 쓴 시인 노작 홍사용(洪思容, 1900~1947) 선생이 있다. 이 시는 암울했던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과 비애를 표출한 시다.
시인 노작 홍사용 선생

시인 노작 홍사용 선생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홍사용 선생은 수원사람이 아니다. 1900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출생해 여덟살 때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 뒤 석우리에 살다가 휘문의숙에 입학한 열일곱살까지 이곳에서 보냈다. 당시 수원군이었지만 해방 후 화성군, 지금은 화성시가 됐으므로 수원 행정구역이 아니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는 현재 화성시 동탄신도시가 들어선 지역이다. 평화롭던 시골마을은 상전벽해가 됐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래도 화성시 측에서 노작공원과 노작문학관을 만들고 노작문학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노작은 휘문의숙(1918년 휘문고보로 개칭) 재학중 교우인 정백·박종화 등과 등사판 작품집인 '피는 꽃'을 펴냈으며 졸업 전 일어난 3․1만세운동 때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3개월간의 옥살이에서 풀려난 후 정백과 함께 고향 석우리에서 은신하며 필사본 수필집 '청산백운(靑山白雲)'을 쓰기도 했으며 1920년에 다시 상경해 문예지 '문우'를 창간했다.

 

1922년엔 이상화·박영희·박종화·노자영·현진건·나도향·이광수·오천석·안석영·원우전 등과 문예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했다. 여기에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와 함께 시 '꿈이면은'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3호에 발표됐다.
 

1923년 토월회(土月會) 신극운동에도 참가하면서 박승희·김복진 등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역시 연극단체인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면서 이소연·박진·김기진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1928년에는 불교잡지 '여시(如是)'를 간행하고 이 잡지에 희곡 '할미꽃'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불교사가 주최한 석가탄신 축하공연에 그의 희곡 '태자의 출가'가 공연되기도 했다. 1932년에는 불교지에 희곡 '벙어리굿'을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일제의 강요로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붓을 꺾어버렸다. 이 일로 거주제한을 받기도 했다. 또 그는 끝끝내 창씨 개명을 하지 않는 등 서릿발 같은 지사의 지조를 지켰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곧 탈퇴하고 1947년 1월17일에 폐환으로 사망했다.

 

박종화는 '달과 구름과 사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회고하고 있다.

'노작의 성격은 꼬장꼬장하도록 강했다.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노작은 사람을 끄는 힘이 많았다. 같은 학우 중에서도 서상천․윤희순․안석주․이승만, 조금 늦어서 이선근․정지용․박팔양 등의 후배들이 모두 다 그들을 사모했던 것이다.'

 

한편 노작은 문학활동과 신극운동을 하면서 몇 년 사이에 무려 1400여석이나 되는 전답을 모두 팔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노작의 장남 홍규선 씨는 지난 2000년에 출간된 '홍사용 전집'에 붙인 글을 통해 '아무리 낭비를 했어도 백조와 토월회 운영에 그 많은 재산이 소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무관학교 출신인 조부의 동기인 상해 임시정부요원들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기억과 나절로씨가 1970년 경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 '노작이 상해 임시정부에 거금 5만원을 냈다는 설'을 예로 들기도 했다.

노작 홍사용 묘소. 앞의 3단 비석이 나를 비롯한 수원지역 인사들이 참여해 세운 시비다. 사진/심춘자 시민기자

노작 홍사용 묘소. 앞의 3단 비석이 나를 비롯한 수원지역 인사들이 참여해 세운 시비다. 사진/심춘자 시민기자

그가 지역사회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5월 26일 동향의 후학들이 중심이 된 시비건립위원회에서 석우리 묘소에 '노작 홍사용 시비'를 세운 후부터다. 당시 경인일보에 '내 고장의 맥'이란 기획시리즈가 있었는데 어경선 기자가 노작에 대해 쓴 것이 계기가 됐다.
 

시비건립위원회는 수원에서 활동하는 문인과 예술인 40여명을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나도 건립위원으로서 기금 3만원을 냈다. 당시 결혼식 축의금이 3천원에서 5천원 정도였는데 그때 직장을 그만둔 내가 낸 3만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후 1985년과 2000년에 각각 김학동씨와 노작문학기념사업회에서 '홍사용전집'을 발행했다. 또 1991년엔 우리문학기림회에서 석우리 마을 입구에 시인의 고향 표석을 세웠으며, 97년엔 한국문인협회에서 석우리 복지회관 앞에 한국현대문학 표징비를 세웠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노작문학기념사업회가 노작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를 개최했다.
 

또 전기한 것처럼 노작문학관이 건립되고 노작문학상이 제정됐으며 노작공원도 조성됐다. 노작의 위업을 기리는 사업들이 활발해 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34년전 시비건립에 한몫을 거든 사람으로서 보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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