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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을 만나다.
역사 속 채제공을 찾아 화서문과 수원 화성박물관, 용인 묘소와 뇌문비 둘러봐
2019-06-07 00:36:25최종 업데이트 : 2019-06-17 14:04:25 작성자 : 시민기자   이경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에 위치한 화서문은 보물 제403호다.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된 화서문은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에 위치한 수원화성 성곽의 서쪽 문이다.

5일 오전 10시 화서문 앞에서 조지영 마을해설사와 기자가 만났다. 마을해설사와 함께하는 수원 여행의 일정으로 명재상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역사적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조지영 해설사는 "채제공은 화성 축성과정에서 총감독을 맡았다고 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행적이나 일화가 없어요"라면서 "번암 채제공의 생애와 활동을 공부하고 싶다"라는 말했다.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보물 제403호로 지정된 화서문이다. 한국에 있는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일대의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華西門'이라 쓰인 편액은 번암 채제공이 직접 쓴 글이라고 전해진다.
1796년 정조 20년에 세워진 화서문은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수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1796년 정조 20년에 세워진 화서문의 편액을 번암 채제공이 썼다.보물 제403호로 1964년 지정되었다.

"그동안 화서문에 자주 왔는데 모르고 있었네요." 조지영 해설사는 역사 속 인물을 만나는 여정이 흥미롭다며 "옹성 위에서 흐릿하게 화서문이라는 필체가 보여요"라고 덧붙였다.

수원 화성박물관에서는 '올바른 신념을 실천한 재상'으로 한 시대를 주도한 인물로 손꼽히는 채제공의 초상(시복본. 2006년 12월 보물 제1477-1호 지정)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초상화의 진수라 불리는 보물로,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조로부터 선물 받은 부채와 향낭을 강조하기 위해 손을 노출한 것 같아요." ,"얼굴의 사실적 묘사와 옷 주름의 세심한 표현이 조선 시대 초상화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초상화를 보는 수원 시민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에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번암 채제공의 초상을 볼 수 있다.

화성성역 총리대신이었던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보물 1477호로 지정되었다.

채제공은 영조 때에 벼슬을 시작하여 정조 때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기자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균형을 추구한 정승으로 그를 기억하는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던 1758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은 일화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다.

조지영 해설사는 "죽음을 불사하고 폐위를 반대하던 체제공이었는데,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나요?"라고 기자에게 물었고 "안타깝게도 모친상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고 시묘살이 중이었죠"라고 답해주었다.

훗날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縢)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에게 깊은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채제공은 수원화성 축성(築城) 당시 총리대신을 맡아 축성을 총괄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데, 빨리 서두르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 3가지의 원칙을 지키며 모든 설계를 경영하고 지휘했다.

수원 화성은 중앙 권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조 시대 문화 혁신의 상징이자 결정체다. 정조의 이 모든 정치사업에 채제공은 동참했고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성곽길을 걸으며 정조의 정치 파트너 번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4에 위치한 채제공 뇌문비가 비각내에 보존되어 있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4에 위치한 채제공 뇌문비각은 묘역 입구 산기슭에서 북서향에 있다.

뇌문비는 정조가 친히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이다.

뇌문비는 정조가 친히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으로, "경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이 믿었노라"라고 하였다.

조지영 해설사와 기자는 마지막 일정으로 용인시에 있는 채제공 뇌문비(誄文碑)와 묘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1799년 1월 18일 채제공의 부음을 들은 정조는 식사를 폐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조지영 해설사가 "뇌문비가 뭐죠?"라고 물었고, 기자는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적어 보내고, 그 글을 새겨놓은 비입니다"라고 말했다.

전각 안에 있는 뇌문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12.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를 직접 살펴봤다. 파란만장한 번암 채제공의 일생은 500여 글자에 가까운 정조의 제문에 모두 열거됐다. 어려운 한자로 쓰인 비의 내용을 다 해석할 수 없지만, 번암에 대한 정조의 마음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5에 위치한 번암 채제공의 묘소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5에 위치한 번암 채제공(1720~1799)의 묘소. 영조와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로 왕의 총애를 받은 명재상이다.

채제공의 묘(산 5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17호)는 바로 위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묘소의 봉분과 상석은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은 신하라고 하기엔 초라한 모습이었고, 많은 업적과 세운 공에 비해 망주석과 석양(石羊)이 한 쌍씩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신하에 대한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높은 칭송으로 세상에 없는 예우를 얻은 인물이었는데 묘소를 둘러보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네요." 조지영 해설사는 번암의 일생에 비해 초라한 묘소를 보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큰일을 감당한 신하,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번암 채제공'을 만난 하루는 특별했고 정조대왕의 명재상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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