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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꼭 가봐야 할 용주사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51
2010-10-28 16:54:08최종 업데이트 : 2010-10-28 16:54:0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이 가을에 꼭 가봐야 할 용주사_1
용주사 입구


수원화성과 융릉, 건릉, 그리고 용주사는 서로 떼어서 볼 수 없는 한 몸이다. 
현륭원(융릉)이 가장 먼저 들어섰고(1789), 이듬해인 1790년에 용주사가 건립되었으며, 수원화성은 1794년 정월부터 시작하여 1796년에 준공을 한다. 

11월 6일 220살 생일 맞는 용주사

용주사는 오는 11월 6일(음력 10월 초하루)이면 220년 생일을 맞이한다. 1790년 2월 19일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0월 1일 국내의 이름난 스님들을 초청하여 부처님 점안재(點眼齋)를 올리는 것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7개월 보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기간에 완공한 것이다. 

용주사를 건립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은 시주금이 총 87,505냥 1전인데, 57,388냥 8전은 건축비로 썼고, 2,000냥은 화주승들의 여비로, 나머지 28,116냥 3전은 논과 밭을 매입하는 데 썼다. 
건축비를 충당하고도 남아서 절의 자립 기반을 위해 전답까지 산 것을 보면 전국적인 모금과 그 호응에 의해 용주사가 건립되었음을 증명한다. 

갈양사 시절 만든 범종은 국보가 되다

이 가을에 꼭 가봐야 할 용주사_2
용주사 범종


이때 '갈양사'라는 자그마한 옛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이름도 용주사로 바꾼다. 
작은 절이었던 갈양사의 과거는 그러나 꽤 화려했던 것 같다. 고려 초에 만든 범종(국보 제 120호)이 지금도 갈양사의 영화를 잘 말해준다. 한국종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말없이 전성기를 증명한다. 

갈양사에서 말년을 보낸 혜거국사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광종 22년(971)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수륙재가 갈양사에서 열렸다고 한다. 수륙재는 물이나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는 불교의식이다.

정조가 갈양사를 고쳐 용주사로 확대 개편하는 데에는 《불설대부모은중경佛說大父母恩重經》의 영향이 컸다. 정조는 경전 속에 든 어버이 은혜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또,《불설대부모은중경》목판과 변상도 목판을 용주사에서 소장하게 한다.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 등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변상도이다. 이로 인해 용주사는 효성의 본찰이 됨과 동시에 불교 교리 중 가장 효성을 강조하는 《불설대부모은중경》의 출판을 총괄하는 본부이자 보급소가 된다.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절

정조는 이 경전에서 강조하는,
"이 경전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면 돌아가신 부모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 세계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는 영험을 믿기라도 한 듯이 실천한 것이다. 더구나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과 그 명복을 정성껏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부모은중경에서 설명하는 부모님의 은혜 열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기를 배어서 지켜주신 은혜. 둘째, 아기를 낳을 때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입에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아 먹이시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는 아기에게 주고 젖은 자리로 나아가시는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기르시는 은혜. 일곱째, 손발이 다 닳도록 깨끗이 씻겨주시는 은혜. 여덟째, 먼 길을 떠날 때 근심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나쁜 일까지도 하시는 은혜. 열째, 임종 때도 자식을 걱정하시는 은혜. 어버이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해마다 오월이면 부르는 어버이 노래의 원조는 사실 이 불경에서 따왔다.

왕릉제향 때 두부 만들어 공급하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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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대웅전 전경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사찰이면서 혜경궁 홍씨와 정조임금 부부, 그리고 용주사를 건립하는 도중에 태어난 세자(순조)의 수복(壽福)도 아우른다. 왕실의 원찰이 된 것이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그 복을 부처님께 빈 셈이다. 

이렇게 왕릉이나 왕실의 무덤을 지켜주는 사찰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로 왕실의 '원찰'을 포장한 셈이다. 이미 봉선사와 봉은사, 보은사(신륵사) 등 왕릉 주변의 절들을 조포사로 삼았다. 이는 뒷날 경기지역 불교가 명맥을 이어오는 근본이 된다. 

용주사를 건립하던 해 5월 17일 조심태는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조포사(造泡寺) 중들의 생활이 빈약합니다. 그들에게도 다 같이 참작해 나누어주고 지혜(紙鞋-종이로 노끈을 꼬아 만든 신발)를 만드는 본전으로 삼게 한다면 반드시 혜택을 입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조포사 스님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해주자는 것이었다. 물론 정조는 허락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포사 스님들이 불경만 외고 생활 방편으로 경제활동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승도(僧徒)가 어쩌면 성을 지키는데 성정(城丁)보다도 더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용주사(龍珠寺)에 이미 총섭(摠攝)을 두어 승도를 단속하게 하고 외영(外營)에 소속시켜 가끔 포 쏘는 법을 시험하면, 이들은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의 승졸(僧卒)과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니, 부근에서 독성(禿城)을 협수(協守)케 하면서 타를 헤아려 증원 파견하는 소지를 삼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본성(本城) 북쪽 광교동(光敎洞) 입구에도 작은 사찰을 세웠는데 모든 일이 초창기라서 엉성하고 승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승도를 모집하여 분위기가 이루어진 뒤에는 용주사의 경우와 똑같이 절목을 마련하여 부근 돈대(墩臺)에 증원 파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정규군보다도 더 훌륭한 군인으로서 승군의 역할도 겸하였다.

고종 16년(1879)에는, 용주사를 보수하기 위하여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발행하여 그 경비를 삼은 것이 실록에 기록되었다. 이름만 듣던 공명첩이 용주사 보수에도 쓰였다니 당대의 재정 형편과 실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액자에 들어간 듯한 대웅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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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루 아래에서 본 대웅전
 

용주사에 갈 때마다 늘 감동을 주는 화면 하나. 대웅전에 가기 위해 천보루 아래를 지나게 되는데 이 천보루 아래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대웅전이 액자 속에 들어간다. 기둥과 땅과 천정이 빚은 액자 속에 대웅전이 쏙 들어가도록 만든 건축가의 안목에 감탄을 한다. 
어쩌면 이리도 완벽하게 조화를 잘 맞추었을까. 지금 그 누가 건축을 하면서 이리도 멋진 그림을 그려낼까?  더구나 나무가 초록을 덜어내고 고운 단풍으로 잎을 치장한 가을이다.
염상균/답사전문가, 화성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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