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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제시기의 수원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52
2010-11-05 09:36:50최종 업데이트 : 2010-11-05 09:36:5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대한독립기념비와 삼일독립기념탑을 찾아서

기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제시기의 수원_1
팔달산의 두 기념물


팔달문에서 팔달산을 향해 오른다. 팔달문 주변은 개발 때문에 성벽이 끊어졌는데 산을 오르면서 옛 성벽을 만나는 지점이다. 성을 따라 가파른 언덕에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야 능선에 다다른다. 중간에 홍난파의 고향의 봄 노래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더욱 가파른 산길을 걷다보면 한겨울에도 땀이 송송 맺힌다. 이윽고 팔달산의 남쪽 능선에 도달한다. 서남암문이 보이고 그 문 밖으로는 용도가 길게 시작된다.

서남암문 안쪽으로 하늘을 보면 커다란 안테나가 보인다. 무선통신 중계기이다. 이 중계기 옆 그윽한 숲속에 삼일독립기념탑이 섰다. 화성을 탐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설혹 왔다고 하더라도 그냥 비껴지나가기 좋은 위치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원의 독립운동 역사가 새겨진 기념비와 기념탑이 서서 그 시절을 증언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게 마련이어서 제 한 목숨과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독립투사들은 어땠는가? 그들의 소중한 운동이 나라를 되찾고 오늘의 풍요와 번성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수원의 독립운동

기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제시기의 수원_2
삼일독립기념탑
  

노인들의 증언과 《팔달산의 함성》책에는 수원의 독립운동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3월 16일 수원 장날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 시초라고 한다. 서장대와 동장대에서 각각 수백 명이 모여 종로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는 것이다. 

3월 23일에는 수원역 근처 서호에서 약 7백 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5일에도 25명의 청년 및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25일에 벌어진 만세운동 주동자의 검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3월 27일에는 상인들이 상점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 때 약 40%에 달하는 상점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3월 28일에도 3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3월 29일에는 수원 기생조합의 기생 약 30명이 자혜 병원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날 밤에는 상인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는 등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기생도 참여한 독립운동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은 일제에 의해 자혜의원이라는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화성행궁 북군영 일대는 수원경찰서가 자리를 잡았다. 수원 지역의 구심점인 행궁을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주도면밀한 '작전'이었다. 

자혜의원에 건강검진을 갔던 김향화와 30여명의 기생들은 자혜의원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자혜의원 앞 수원경찰서에는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였으나,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도 굽히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스물셋 나이의 기생 김향화는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생들을 이끌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서 코앞에서 만세를 불렀으니 이미 붙잡힐 각오를 하고 만세를 부른 것이다. 

김향화는 갖은 고문 끝에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김향화는 2009년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수원의 독립운동은 오산, 송산, 사강, 남양, 발안, 반월 등으로 옮겨 퍼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내 제암리교회의 참화를 빚게 하였다. 제암리에서만 32명의 고귀한 생명이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는가? 

중포산이 동공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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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기념비
  

방화수류정 동쪽 언덕은 중포산으로 부르는 곳이었다. 중포산은 삼일실고 운동장 끝자락에 화성축조 때 세운 중포사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삼일실고 정문 앞은 광교산 창성사 터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옮겨 세운 곳 주변이다. 또 여기에는 현충탑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곳에는 일본인 노구찌 순국비를 세웠던 곳이며 동공원으로 불렀던 곳이다. 

노구찌는 수원경찰서 소속 경찰이었는데 1919년 당시 사강주재소의 순사부장이었다. 3월 28일 사강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한 명의 부상자만 낸 시위였으나 성난 민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달아나는 노구찌를 돌로 쳐 죽였다. 일제는 만세운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보란 듯이 노구찌 순국비를 세웠다.

광복 기념으로 독립기념비를 세우자

기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제시기의 수원_4
기념비와 기념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수원시민들이 몰려가 노구찌 순국비를 부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그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세웠다. 아주 이례적으로 앞뒤에 똑같이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겼다. 노구찌의 순국비는 모두 깨버렸지만 기단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힘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팔달산에 삼일독립기념탑도 세우자

1969년 3월 1일 삼일동지회는 뜻을 모아 '삼일독립기념탑'을 팔달산에 세운다. 당시만 해도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휴식을 갖던 곳이 팔달산이었다. 또한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는 곳에 기념탑을 세워 투사들의 독립의지를 시민들에게 널리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시민들이 팔달산을 우러러 보듯 기념탑을 올려다보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15일 노구찌 순국비 자리에 1945년에 세웠던 대한독립기념비를 새 기념탑 옆으로 옮겨온다. 그래서 두 기념물이 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어느덧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도 100여 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며 오늘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내세운 독립정신을 우리는 지금 얼마나 되새기는 중일까.

팔달산에 세운 대한독립기념비와 삼일독립기념탑은 그래서 보다 좋은 장소로 옮겨야 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때를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 화성행궁 광장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옮겨 세우면 어떨까? 
염상균/화성연구회 이사, 답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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