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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모두 다녀간 독산성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58
2011-01-03 18:53:53최종 업데이트 : 2011-01-03 18:53:5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모두 다녀간 독산성 _1
독산성 성벽-수원시청 이용창 사진


천연의 요새 독산성

수원에서 남쪽으로 병점을 거쳐 오산으로 가다 보면 죽미 고개가 나온다. 
죽미 고개를 다 오르기 전에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서 2km 가량 가면 독산(禿山,벌거숭이 산, 대머리 산)이 나오고, 이 산에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독산성이 나오는데 성의 정상에 세마대(洗馬臺)가 있다. 
용주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황구지천을 건너도 독산(禿山)이 나온다. 수원을 에워싼 땅줄기의 왼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다. 예부터 '수원고읍성'의 대피용 산성으로 경영된 곳이다. 산성이니 방어에 효과적이고 황구지천을 건너야만 접근하므로 자연의 해자를 두른 천연의 요새라 할 것이다. 

여기에 올라보면 옛수원의 중심인 융.건릉 일대가 내려다보이면서 황구지천이 가로막혀서, 수원 관아에 쳐들어왔던 적이 독산성으로 대피한 아군의 행보를 눈치 채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에 독산성 세마대 전설로 남아 산성의 우수함을 다시 일깨운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수원시도 화성시도 아닌 오산시이지만 옛날에는 수원 지역의 중요한 산성이었다. 새 수원으로 옮겨오기 이전의 옛 수원 시절 위험이 닥치면 대피하곤 하였던 수원의 대표산성이다.

산성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물러가라고 소리치며 저항하면 적들은 제 풀에 지쳐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방어 전략을 농성(籠城)이라고 하는데, 산성의 장점을 잘 살리는 전투 방법이다. 물론 산성으로 대피하기에 앞서 농성할 만큼의 충분한 식량과 병장기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고 들판의 곡식까지도 없애야‐청야작전‐ 적들이 버틸 근거가 없어져 승리하게 된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모두 다녀간 독산성 _2
보적사 뒤에서 바라본 세마대-수원시청 이용창 사진


임진왜란 때 금산의 이치(梨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서울로 향하던 권율 장군은, 용인에서 크게 패하여 독산성에서 전열을 가다듬게 된다. 왜병들은 독산이 벌거숭이 산이어서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물지게를 지고 올라와서 조롱하곤 하였다.

적이 잘 보도록 말을 씻겨라

사실 성 안의 물은 점점 말라가서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권율 장군이 기지를 발휘한다. 적군들이 보기 좋은 곳으로 말들을 끌고 가서 말을 목욕시키게 한 것이다. 
이를 성 아래에서 본 왜군들은 산꼭대기에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많다고 잘못 판단하고는 물러가게 되었다. 사실 이때 말을 목욕시킨 것은 물이 아니라 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는 영락없는 물이 아닌가?

그래서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가 세마대이다. 여기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권율 장군의 군대가 행주산성으로 가서 행주대첩을 이끌었으며 서울을 되찾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인가. 1760년 7월 사도세자는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휴가를 간다. 이때 사도세자는 수원부(옛수원)에 들러 백여 년 전인 1659년 효종의 능으로 쓰려고 하였던 자리에 오른다. 
사방을 두루 둘러보고 참 좋은 자리라고 감탄을 한참 하다가 독산성의 처소로 돌아온다. 그 좋은 자리에 29년 후 자신이 묻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무예를 좋아해서 거둥길의 복장도 군복을 입은 터였다. 독산성 안팎에 사는 백성들을 만나보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 2년도 못된 1762년 세상을 떠난다. 그것도 뒤주에 갇힌 채 엽기적인 죽음으로. 

인생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1789년 사도세자의 유해는 효종의 능 자리로 추천되었던 곳에 안장되고 그 아들 정조는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독산성에 오른다. 아버지가 다녀갔을 때 만났던 백성을 다시 만나 그때 주고받은 말을 되물으면서 포상까지 내린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모두 다녀간 독산성 _3
세마대-수원시청 이용창 사진
 

사도세자와 정조임금이 차례로 다녀간 독산성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효종을 흠모하였다. 직계를 따져 올라가면 효종은 사도세자에게 고조할아버지가 되는데 모습이 서로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사도세자는 15,6세 때부터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면서 무예를 닦았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가지고 신체를 단련하였다. 어지간한 장수도 들기 어렵다던 무기를 가볍게 쓸 정도로 재능이 발전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온천행의 첫 행선지로 수원을 꼽았고, 효종의 능이 될 뻔했던 곳을 답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독산성에서 군사들의 무예를 열병한다. 강한 군사력에 대한 미련이 컸던 것이다.

정조 16년(1792) 정조는 독산성을 고쳐 쌓도록 한다. 현륭원에서 가까운 곳이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머무르고 숙박하였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정조는1790년 현륭원을 참배하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 산들을 두루 살펴본 다음 독산성으로 간다. 30년 전 사도세자의 행차 때 구경 나왔던 노인들을 불러 만나보고는 쌀을 내려주었다.

승병의 주둔지-보적사

독산성에도 여느 산성처럼 승병의 주둔지로 절을 경영하였다. 
지금도 성문을 통해 신도들이 드나드는 보적사가 바로 그 절이다. 한때는 세마대를 본떠서 세마사라고도 하였다. 산사에 가면 대개 맑고 시원한 샘물이 풍부한데 이 절에는 권율의 세마대 일화대로 물이 부족하다. 마시는 물은 제공하지만 담아가지는 말아달라고 쓴 안내문이 곧 그것이다.

좁고 긴 구비길을 올라 주차장에 당도하면 보적사로 오르게 되고 보적사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세마대가 나온다.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놓였고 주춧돌이며 기단석들도 일부 보인다. 세마대 현판은 이승만 전대동령 글씨이다. 
세마대를 내려와 독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이곳이 왜 요새인가를 대번 느끼게 된다. 적당한 곳에 둔 암문이며, 치성들도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데 일조를 한다. 
성의 길이는 1.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므로 언제 가더라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답사하기 좋다. 다만 버스를 타고 가면 30분 남짓 걸어 올라야 보적사 앞 주차장에 다다른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모두 다녀간 독산성 _4
독산성의 치성-수원시청 이용창 사진


독산성은 수원 지역의 성 가운데 하나였고 화성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수원고읍성과 함께 수원에서 가장 중요한 성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의 교훈과, 대를 물려가며 올바른 정치를 펴고자 하였던 사도세자와 정조의 체취가 남아 숨을 쉬는 곳이다. 
염상균/문화유산 답사 전문가, (사)화성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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