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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은 신령스런 용과 거북이가 보호하는 터전
염상균의 수원이야기-60
2011-01-19 14:26:31최종 업데이트 : 2011-01-19 14:26:3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화성의 대들보는 수원천

수원은 신령스런 용과 거북이가 보호하는 터전_1
거북산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빌딩


수원화성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하천이 수원천이다.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화성의 중심을 꿰뚫고 흐르는데 본래의 이름은 버드내라고 하였다. 
곧장 뻗어 흘러서 '벋으내', 혹은 버드나무들이 제방을 장식하여 '버드나무내'의 줄임말로 그리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두 연원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버드내가 화성과 처음 만나는 곳은 화홍문이다. 화홍문 주변에 광교산 자락이 흘러와 정기를 맺은 용두암이 보이는데 바로 방화수류정의 북쪽 아래 바윗덩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이름이 용두각이며 용두암에 걸맞게 연못을 조성하고 용연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용연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는 이무기 머릿돌을 설치하고 그 입으로 용연의 물을 뿜어내게 하였다.

수원은 신령스런 용과 거북이가 보호하는 터전_2
용연의 출수구
 

한옥의 마룻대 상량문에는 용(龍)'과 귀(龜)라는 글자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용과 거북이가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목조 건축의 치명적인 약점인 화재를 막아줄 것이라는 소박한 염원이다. 즉, 상서로운 동물인 용과 거북이를 앞세워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는 의미이다. 

혹은, 용귀(龍龜)는 용과 거북이가 합쳐진 형상으로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몸통은 거북이의 모습을 띤 신령스런 동물이라고도 한다. 화재를 막아주는 주술적인 바람이나 신령스런 동물로 집을 지키고자 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용(龍)자를 거꾸로 써서 바로 쓴 마지막 글자 귀(龜)자와 마주보게 하여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수원화성의 용과 거북이

화성의 마룻대라고 할 수원천 상류에 용두암과 용연과, 이무기 머릿돌을 만들었다면 하류 어딘가에 거북이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지금은 구천동이란 지명으로 남았지만 예전에 이곳에 거북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었다고 노인들이 증언한다. 그 거북산 자리에는 오늘날 빌딩이 들어섰지만 안개가 낀 날 팔달산에서 바라보면 거북이가 팔달산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거북산 일대를 흐르는 수원천의 이름이 거북내-거부내였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수원화성의 마룻대는 수원천이고 그 상량문이라고 할 용자와 귀자는 글씨대신 형상으로 장식한 셈이 된 것이다.

싸전거리 초라한 모습의 거북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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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산당


거북산의 이름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흔적이 바로 수원시 향토유적 제 2호인 거북산당이다. 
수원화성의 민속신앙 중심이었던 거북산당은 그러나 지금 초라한 상태로 겨우 명목을 유지해 간다. 가로 4.9미터, 세로 2.5미터 면적 12.25미터여서 겨우 네 평도 채 안 되는 크기이다. 

그래도 아직은 이 산당을 지키는 만신이 거주하며 촛불을 밝힌다.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 신을 모시고 해마다 음력 7월 7일과 10월 7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영동시장 상인들이 주축이다. 
지역문화연구소의 정승모 소장은, 도당할아버지는 관우장군의 모습 같다고 하며 관우장군을 모신 당집에는 상인들이 자주 찾아와서 복을 빈다고 한다. 관우장군은 재물을 안겨주는 신으로 추앙하기 때문이란다.

거북산당은 수원화성을 축조하기 이전인 1790년경에 세웠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아마도 새도시 수원의 구심점이었다가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상인들의 재물 복을 빌어주는 신당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거북산당 주변은 영동시장의 일부이면서 싸전(미곡상)거리였다. 50~60년대와 70년대 번성기에는 60여 개의 점포가 경기 남부지방의 곡식을 좌우하며 성업 중이었던 곳이다. 

수여선을 아시나요?

일제강점기 일제는 곡식의 수탈을 위해 수원 여주 사이 수여선 협궤철로를 놓았다. 개통은 1930년이고 사철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주관하게 하였다. 
수원역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뉴코아백화점 앞 본수원역(뒤에 화성역으로 바꿈)과 원천, 신갈, 어정, 용인, 양지, 오천, 이천, 여주 등을 오갔다. 
용인과 이천, 여주 등의 곡창지대 쌀을 서울로 실어가다가 1937년에 개통한 수원과 인천 사이 수인선으로 옮겨 실어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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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시장 싸전거리
 

광복 뒤 화성역(본수원역)은 자연스레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영동시장에 싸전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삼았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싸전거리엔 아침마다 늘 활기가 넘쳤다. 거리 전체가 쌀가마니로 즐비했으며 힘깨나 쓰는 인부들이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옮겼다. 

이즈음 비둘기며 참새들도 한몫을 하여 떼로 몰려왔다. 싸전거리에 흩어진 쌀과 상인들이 흩뿌린 싸라기를 주어먹느라 북새통을 더해 주었다.

영동시장도 살리고 지역경제도 살리기 위하여

거북산당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싸전거리도 시들해졌다. 뿐만 아니라 영동시장도 한적하기만 하다. 
주차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동시장은 면적이 넓어서 점포도 많고 그런 이유로 다른 시장보다 가격도 싸지만 편리성에서 대형마트에 뒤진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70년, 80년 전통을 자랑하는 점포만 하더라도 수십 개를 헤아리는 영동시장이다. 그 역사도 수원화성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다. 

대를 물려가며 영화를 누렸던 시장이 쇠락한다면 상업 중심지였던 수원의 역사도 이제 한 축을 잃게 된다. 
거북산당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치성을 잘 드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용과 거북이 화성을 든든하게 지켜준 것처럼 영동시장을 비롯한 수원시민의 삶도 더욱 윤택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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