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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수원
"근대화 물결 속의 수원"
2008-01-04 14:39:18최종 업데이트 : 2008-01-04 14:39:18 작성자 :   e수원뉴스

전국에 4곳 밖에 없던 유수부로서 농업과 상업 도시로 이름을 날리던 수원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1895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을 통해 유수부가 폐지되고 수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전국을 한성부의 1부와 13도로 나누고 각 도마다 관찰사를 두고 관찰부를 지정했습니다. 관찰부란 지금의 도청 소재지와 같은 곳입니다. 수원이 경기도의 관찰부가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당시 수원군은 40개 면과 560개 마을을 두어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한편 수원은 교육열이 매우 높은 곳으로, 1896년 2월 10일에 수원 경기 관찰 소학교가 세워지는 등 근대적 교육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에 용감히 싸웠던 수원에서도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수원을 근거지로 한 대표적 의병 부대는 홍일초 부대였습니다. 홍일초 부대뿐이 아니라 수원의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우리 나라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통치를 한다는 구실로 우리 나라의 행정 구역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나라의 전통을 없애려는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한성부의 이름을 경성부로 바꿔 경기도 관할 하에 두었고, 경기 도청을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수원의 위상이 잠시 흔들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일제는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있는 면의 명칭과 구역의 통폐합을 포함한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고 수원군은 20면으로 통폐합되었으며, 군의 전체 마을은 270리가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일제의 강력한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수원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3월 1일에는 제암리 교회에서 시위가 있었고, 화홍문 일대에서도 수백 명이 일제에 맞섰습니다.

3월 16일에는 서장대에서, 21일에는 수원군 동탄면에서, 23일에는 서호 부근에서 약 7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수원의 만세 시위는 4월 중순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제암리의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어 불태워 죽이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1년 4월 1일에는 전국 41개 지정 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수원군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원읍의 각 리의 명칭이 본정·매산정·궁정과 같은 일본식의 지명으로 바뀐 것도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수원에서는 3·1운동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 청년, 여성, 농민, 노동자들이 독립 운동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금의 수원 농생명 과학고등학교인 수원고농이 1920년대에 계속해서 학생 운동을 벌였고, 1930년대에도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못쓰게 하는 정책에 대항해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독서회 활동을 벌였습니다.

수원 지역은 구한말 당시의 의병 운동에서 일제 강점기의 학생·청년 운동에 이르기까지 항일 독립 운동을 앞장 서서 전개해 나갔던 대표적인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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