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수원에 '세종대왕 가족 공원' 조성되고 있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35
2010-04-16 08:00:04최종 업데이트 : 2010-04-16 08:00:0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에 '세종대왕 가족 공원' 조성되고 있다_3
심온 묘소에서 광교신도시(공사 시작 전)를 굽어보다-수원시 이용창 사진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 선생 묘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나들목 바로 옆에 오래된 무덤이 보인다. 하루에도 수많은 자동차가 이 길을 따라 고속도로로 들어가거나 나오고, 용인 수지 쪽에서 수원으로, 또 수원에서 용인 수지 방향으로 물처럼 흐른다. 이 묘소가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세웠으나 사람들은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 채 자동차에 앉아서 그저 지날 뿐이다.

세종대왕의 장인이자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 선생의 묘소는 광교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앉아서 원천저수지를 굽어보는 명당이다. 고속도로 때문에 광교산의 자락이 잘리긴 했어도 묘소에 올라보면 조망이 좋은 장소라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된다. 더구나 이 자리는 명품 광교신도시를 굽어보는 장소임에랴!

심온(沈溫, 1375~1418) 선생은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 초에 관료생활을 하면서 신생국가 조선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특히 태종 때에는 1408년 세종의 장인이 되면서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태종의 국정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사위인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의정부사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사은사 일행이 명나라로 향할 때 연도에 사람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이 보고를 받은 상왕 태종은 불쾌해 했다고 한다.

태종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심온

수원에 '세종대왕 가족 공원' 조성되고 있다_1
심온 묘 전경-수원시 이용창 사진

왕위는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고도 병권만은 놓지 않았던 태종을 비판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로 심온 선생이 지목되면서 불행을 겪게 된다. 군사권에 대한 호령이 세종과 태종 두 군데서 나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들은 병권은 마땅히 현 임금인 세종이 쥐어야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심온 선생이 사은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국경에 도달하자 체포령이 떨어졌고, 이내 수원으로 압송되어 사약이 내려졌지만 그는 자결을 하고 만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또한 권력이 왕의 장인에게 쏠리는 것을 두려워 한 상왕 태종의 결단이었다.

왕권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태종의 선택이었는데 태종은 이미 자신의 처남 넷을 죽인 전력도 지니지 않았던가? 권력의 세계는 그만큼 냉철한 것인가 보다.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장인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세종과 아버지의 흉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왕비 소헌왕후의 심정이 어땠을까? 

나중에서야 태종과 좌의정의 무고임이 밝혀져 심온 선생은 명예회복이 되고 시호까지 받았지만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죄인의 딸이니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왕비를 더욱 사랑한 세종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묘비는 세종의 셋째 아들로서 당대 명필인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수원에 '세종대왕 가족 공원' 조성되고 있다_2
심온 묘비(안평대군 글씨)-수원시 이용창 사진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세종의 이복동생 혜령군

심온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태종은 원수나 마찬가지이다. 그 아홉 번째 아들인 혜령군(惠寧君,1407~1440)의 묘소가 하필이면 심온의 묘소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앞산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마도 동생을 사랑한 세종이 동생의 묘를 수원에, 그것도 장인의 무덤 근처에 쓰게 하면서 두 묘역을 국가에서 관리하도록 한 것이리라. 그래서 혜령군의 묘소는 수원 유일의 왕자묘가 되었다.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로 혜령군이 죽자 세종대왕은 매우 슬퍼하여 수라도 들지 않고,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음력 6월 말의 무더위와 아픈 몸으로 인해 운신하기도 어려워서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동생에 대한 세종의 사랑까지 꺾지는 못하였다. 머리를 풀고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3일 동안 정사를 폐지하고 장례를 잘 치르도록 물품도 후하게 내린다. 또한 친히 제문을 짓고 '양회(襄懷)'라는 시호도 내려준다. '양(襄)'은 살아서 국사에 큰 공로가 있었음[因事有功]을 뜻하며, '회(懷)'는 인자하면서 일찍 죽은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慈仁短折]으로 동생에 대한 세종대왕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의 마음이 보인다.

혜령군은 외아들 예천군과 세 딸을 두었는데 예천군의 묘소도 혜령군 묘역 근처에 썼고 역시 예천군의 아들인 축산군의 묘소도 주변에 들어섰다. 그러나 혜령군 가족의 묘역이 광교신도시에 들어가게 되면서 부득이 이 묘소들을 모두 옮기게 된다. 물론 혜령군의 후손들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라고 한다. 새로 옮기는 장소는 심온 선생의 묘역 서쪽이어서 세종의 가족 공원이 꾸며지게 되는 셈이다. 장인과 이복동생 부부의 묘소, 그리고 이복동생의 아들과 손자의 묘까지. 

세종가족 역사공원

아직은 묘소며 재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수원에 또 하나의 역사 공원이 들어서게 되니 반가울 따름이다. 더구나 그 인물들이 세종대왕의 가족들이므로 수원은 이제 조선의 국왕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받는 세종을 기릴만한 명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심온 선생의 묘소며 혜령군 가족 묘소를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다만 지하의 심온 선생이 태종의 아들인 혜령군 가족을 흔쾌하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정조의 의지에 따라 축성된 수원화성과 화성박물관, 그리고 수원박물관과 세종 가족 공원으로 이어지는 '역사벨트'가 생긴 셈이고, 그 벨트는 용인 수지의 조광조 선생 묘역과 그를 모신 심곡서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역사적인 유적들을 잘 활용하면 광교신도시도 진정한 '명품'이 될 것이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문화유산 답사 전문가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