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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우시장에 흘러넘치던 현금 다발
염상균의 수원이야기36
2010-04-23 11:49:41최종 업데이트 : 2010-04-23 11:49:4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재산목록 1위는 누렁소

수원우시장에 흘러넘치던 현금 다발_1
수원의 쇠전-1950년대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역할 때문에 재산목록의 동산 가운데 첫째였다. 값도 비쌀뿐더러 아무 때나 현금으로 만들 수 있는 환금성도 좋은 가축이었다. 
더구나 수원은 자족적인 도시로 키우기 위해 수원화성 주변에 설치한 저수지들과 둔전 덕택에 농업이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수원은 27편에서 다룬 대로 화성의 축조로 인해 쇠전(우시장)이 활성화 된 도시다. 

수원의 쇠전은 행궁 앞 북수동성당과 팔부자거리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가 화홍문 밖으로 옮겼고, 다시 곡반정동으로 옮겨간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긴 변화이다.
수원은 서울과 가깝고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삼남으로 가는 대로가 수원을 거치게 되면서 쇠전도 각광을 받는다. 즉 수원의 쇠전은 수원 인근 지역의 소만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전국의 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60년대나 70년대만 하더라도 트럭보다는 기차의 화물칸에 소를 실어 날랐다. 그 느릿느릿한 쇠걸음처럼 기차도 느리기만 하였는데 충청이나 전라도에서 올라온 소들이 수원역에서 줄지어 나오는 장면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다큐멘타리 영화 같았다.

소여관엔 소와 사람이 함께 투숙하고

수원우시장에 흘러넘치던 현금 다발_2
수원의 쇠전-북수동


수원역에서 내린 소들은 채꾼이라는 전문 소몰이꾼들에 의해 다섯 마리씩 고등동과 화서동을 거쳐 장안문 밖 임시 숙소로 향한다. 마치 오늘날의 축사처럼 대형 외양간을 만들어 소를 이틀이나 사흘 정도 먹이고 재우는 집이었다. 통상적으로 부르던 이름은 '소여관'이었는데 여기서는 소를 배불리 먹이는 임무가 주된 일이다. 
먼 길을 고생하며 온 소들인지라 다소 여위게 되는 것은 기본, 하루에 네 끼나 다섯 끼를 먹이면서 배를 '빵빵하게' 부풀리는 것이다. 그래야 값을 더 받게 되니까. 수원의 전통장은 4,9장인데 4, 9, 14, 19, 24, 29일마다 장이 설 때 쇠전도 함께 선다.

장안문 밖에는 70년대에 소여관이 대여섯이었는데 수백여 마리의 소를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며 소장수를 비롯한 거간들까지도 먹고 자고 하였던 시절이다. 
당시 소여관을 경영하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채꾼들은 쇠죽을 쑤어 먹이는 일과 소를 깨끗이 닦아 상품성을 높이는 일도 겸했다고 한다. 

소여관은 소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붐볐는데 큰 무쇠 솥을 미처 닦아낼 겨를이 없어 누룽지를 그대로 두고 새 밥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장수들과 거간들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지만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노름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소장수들이어서 그들은 배포가 크므로 판돈도 컸다고 한다.

쇠전에 넘치는 현금-전대에 돈을 담아 허리에 두르던 소판 돈


수원우시장에 흘러넘치던 현금 다발_3
영화동 쇠전-화홍문 밖 천변-다음 지도


명절은 앞둔 쇠전은 쇠말뚝 하나에 두 마리 소를 매야 할 정도로 활기가 넘쳤고 그만큼 현금 다발도 무수히 오갔다. 

당시의 쇠전은 화홍문 밖 수원천변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큰 장이 서는 날에는 각종의 '야바위꾼'들과 순진한 사람을 꼬여 돈을 빼앗는 사기꾼들도 설쳤고, 국수나 국밥 등 간이음식점도 성황이었다. 소의 고삐나 코뚜레 등 소와 관련된 물품을 파는 사람들은 꼭 왔었고 값싼 옷이나 신발을 파는 장사꾼도 더불어 신명을 날렸다. 

이때는 벌써 소가 단순한 일소로 거래되는 것보다 비육우(고깃소)로 거래되는 숫자가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바짝 마른 소를 싼 값에 사다가 살찌운 다음 비싸게 팔면 돈이 꽤 되어서 농가의 사업으로도 자리를 잡을 때였다. 그리고 그런 농민들은 돈을 떠나서 그 성취감이 더 좋았다고도 한다. 농사도 지으며 틈틈이 기른 소들로 목돈을 마련하기도 했으니 수원 지역 농촌의 경제력은 다른 농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도둑을 잡아라
그러나 그만큼 소도둑도 많이 들었고, 소판 돈을 강탈하는 강도 사건도 가끔 나왔고, 노름을 즐기는 사람도 더러 생겼으며 그 판돈도 주변 마을과 견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둑으로부터 소를 지키기 위해서 야간순찰을 돌기도 했지만 도둑은 가끔씩 들어 마을을 들쑤셔놓았다. 소도둑이 든 것을 안 순간부터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도둑을 찾아 나섰다. 

마을의 외곽으로 추격하면 도둑들이 소를 죽여 해체하다가 놓고 도망간 일부라도 건져왔다고 한다. 아주 빨리 뒤쫓으면 소를 산 채로 되찾아 끌어 오기도 하였고. 소 한 마리가 한 집의 가장 큰 재산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지금처럼 수입쇠고기에 의존하는 세상에서는 마치 다른 나라의 일처럼 들리는 얘기다. 

수원우시장에 흘러넘치던 현금 다발_4
순한 눈망울의 누렁소


물 먹인 소 사건
또한 수원의 쇠전에서 거래되는 소의 양이 많다 보니 웃지 못 할 일도 더러 생겼다. 쇠죽을 쑤어 먹여 소를 배 불리는 게 아니라 물을 먹여 배를 채워 파는 사람이 경찰에 붙들리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예 물 호스를 소의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고 수도꼭지를 틀었다고 하니 그 소가 받았던 고통이며 물 먹인 소를 산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1978년 3월 21일(화) 자 경기신문(현 경인일보)에는 '시중에 부정육류, 물 먹여 잡은 후 몰래 반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도살하기 전에 강제로 물을 먹이거나 도살한 후 고기에다 물을 주입시켜 고기의 질은 크게 낮아지고 무게는 늘어나서 악덕업자들의 지갑만 두둑해진다는 기사이다. 또한 도살장을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도살을 하고 운반도 냉동 차량이 아닌 일반 차량으로 하므로 위생문제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큰 이로움을 안겨주고 희생만 하는 소, 그 소의 순하디 순한 눈망울을 생각하면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죄스러울 뿐이다. 
더구나 수원은 소와 관련이 깊고 소갈비가 유명한 곳이니 어디에 '우공위령탑'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지 않을까?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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