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갑옷투구 무장한 정조대왕 서장대 오르시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42
2010-06-04 09:27:35최종 업데이트 : 2010-06-04 09:27:35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장대란 장수의 지휘본부

갑옷투구 무장한 정조대왕 서장대 오르시다 _1
서장대와 서노대-수원시 이용창 사진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엄정한 군법을 반포하고 시행해야 하므로 위엄이 있어야 하며, 그 위엄을 여러 군사들에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가 모일 너른 터전이 필요하다. 또한 장수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세를 한눈에 보아야 하므로 사방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장대는 또한 군사 조련장이어야 하고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워줘야 하는 곳이다. 잘못을 저지른 군사는 벌을 주어 마땅하지만, 공을 세운 군사들에게는 각종의 상전이나 음식들을 내려서 그 공을 치하하는 곳으로도 쓰여야 한다. 

화성의 장대는 둘이다. 하나는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화성장대)이고, 또 하나는 넓은 조련장을 갖춘 동장대(연무대)이다. 서장대가 장수의 위엄을 드러내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면, 동장대는 군사 훈련과 사기 진작 등의 실질적인 군대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편액은 정조가, 상량문은 채제공이

두 장대 중 서장대는 화성의 총 지휘소이다.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그것도 2층으로 지어서 권위를 한껏 드러내고 전망도 좋아서 화성 전체를 통제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그 격에 맞추기 위해서 정조는 <화성장대>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려준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팔달산 장대의 상량문은 체모에 관계된 것이므로 대신들 중에서 일찍이 유수를 지낸 사람으로 짓게 해야 할 것이니, 채 영부사에게 짓고 써서 올리게 하라."
고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인 총리대신 채제공을 지목한다.
그러자 채제공은 상량문에서,
"지금 이곳에서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나. 무거운 책임을 부탁할 사람은 장수라네...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것이 귀한 것이니... 석성에 봉화가 오르지 않으니 매일 밤 편안함을 알리고, 시내는 맑고 바다는 잔잔하니 밝은 임금 만세 천추토록 사시기를 바라노라."(중간중간 발췌)
고 하여 장수의 역할과 중요성, 유비무환의 자세, 평화 지향적인 자신의 생각에 임금의 송덕까지 기린다.

갑옷투구 무장한 정조대왕 서장대 오르시다 _2
서노대-수원시 이용창 사진

혜경궁 홍씨 회갑연 전야제

을묘년(1795) 윤 2월 12일(양력 4월 초)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하루 앞두고, 정조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묘원인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약속과 달리 혜경궁 홍씨는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정조 또한 울적한 심사였으리라. 그러나 이날 오후와 밤엔 화성의 군대인 장용외영의 군사 훈련이 예정되었다.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계획된 일정에 의해 엄정하게 이루어지는 낮 훈련(성조城操)과 야간 훈련(야조夜操)까지 지켜보았다. 특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의 전야제라 할 야간 훈련은 화려하고 멋진 광경이었다. 

깃대에 매단 등을 흔들자 각 문마다 불을 켰고, 나팔을 불고 징을 치니 온성에 군사가 일시에 늘어서서 행진하였다. 서장대에서 대포를 쏘고 날라리(태평소)를 불면서 청룡기와 청룡등을 세우니 창룡문(동문)을 비롯한 동성에서 대포로 응포하고 고함을 지르며 행진하였다. 주작기에 주작등을 세우면 팔달문과 남성에서 대포 쏘며 고함 치고 행진하고, 백호기와 백호등이면 화서문과 서성, 현무기와 현무등이면 장안문과 북성에서,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다가 신기전(신호용 불화살)을 놓으니 온 성안에 삼두화(세곶이로 된 횃불)가 밝혀졌다. 요즘의 불꽃놀이보다 더 즐겁고 화려했을 것이다.

성안의 민가에서 집집마다 등을 하나씩 내걸어서 협조한 것은 물론이다. 이날의 전야제는 어머니와 정조 자신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고 한다. 
구경하는 사람들로 길이 메었고, 보는 이마다 생전 처음 보는 구경이라 했으니 장관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성역은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으니 꽤나 어수선하였을 터인데도 전야제를 멋지게 장식한 것이다.
이 군사 조련의 와중에도 정조는 어머니가 혹 대포 소리에 놀랄까 걱정되어 대포의 방향을 서북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한다.

서장대 옆의 서노대와 없어진 후당 3칸

갑옷투구 무장한 정조대왕 서장대 오르시다 _3
2006년 화재 당시의 서장대-수원시 이용창 사진


서장대는 팔달산 바로 아래에 놓인 행궁을 보살펴야 하고 성 전체의 동정을 낱낱이 알아야 하며, 봉돈에서 받아들인 국경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장대에서 내보내는 신호는 온 성의 군사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리적 이점을 얻어 장대를 짓고 노대(서노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군사 활동에 필요한 후당(後堂) 세 칸을 지었다. 그러나 언제 사라진지도 모르는 후당은 아직도 복원하지 않았다. 발굴을 하여 그 흔적만이라도 찾아내면 좋겠다.

서노대(西弩臺)는 중국의 무비지(武備志)에서 그 제도를 본떴지만 그대로 만들지는 않았다. 
무비지에, '노대는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고 노수가 그 안에 들어가 쇠뇌(쇠뇌는 활에서 유래하지만 활과는 달리 먼 거리를 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기다. 그 소리와 위세가 마치 사람이 성을 내는 것(怒) 같다고 해 그 이름을 쇠뇌(弩)라고 했다.)를 쏘는 곳'이라 했다. 그러나 서노대를 비롯한 화성의 노대에는 대 위에 집을 짓지 않았다.

갑옷투구 무장한 정조대왕 서장대 오르시다 _4
2007년 복원 준공식-수원시 이용창 사진


"서장대의 터는 돌과 자갈밭인데다 그 지세는 동북으로 비탈이 졌으면서도 대 아래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좁았다. 그래서 돌을 쌓고 흙을 포개어 나무를 꽂고 모래를 입혀 둘레가 꼭대기와 가지런하게 하여,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도록 장소를 넓게 하였다. 이렇게 더 보태어 쌓은 높이가 거의 3장(약 9미터)이고 산마루에 터를 닦은 것이 사방 70보(약 84미터)이다."

갑인년(1794) 8월 11일부터 터를 다졌고, 9월 10일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하였다. 
어렵고 힘든 공사였지만 그래도 두 달이 채 안 걸렸으니 당대 건축가들의 놀라운 집중력 덕분이리라. 그만큼 수원화성의 총 지휘소인 서장대 건설에 기울인 관심이 어땠는지를 알겠다. 
그러나 2006년 봄, 어느 몰지각한 젊은이의 방화로 인하여 일부가 불에 탔고 이듬해인 2007년 봄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염상균/화성연구회 사무처장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