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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지대 딸기와 포도는 다 어디로 갔을까?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45
2010-06-24 18:21:37최종 업데이트 : 2010-06-24 18:21:3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노송지대 딸기와 포도는 다 어디로 갔을까?_1
노송지대의 노송-사진 이용창-수원시청

노송지대는 정조 임금의 행차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정조 임금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를 하기 위해 행차할 때마다 이용하던 길이다. 옛길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 길가에 심은 소나무들인데, 연륜이 깊어가면서 노송이 즐비한 길이 되었고, 이내 이 주변을 노송지대로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고개 가기 전 이목동 노송지대

수원에서는 북쪽 관문인 지지대고개를 가기 전에 노송지대를 만난다. 아니, 이제는 노송지대를 비켜서 새로 난 산업도로로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해서 노송지대는 사람들도, 자동차들도 잘 찾지 않는 도로가 되었다. 한때는 포도밭이 즐비하였고 포도나무 아래와 주변에 딸기를 심어서 봄이면 딸기로, 가을이면 포도 때문에 사람들로 길이 메어질 정도의 '번화가'였다. 

1967년 2월 3일자 인천신문(현 경인일보) 보도에, '딸기와 포도의 명산지로 알려진 이곳에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딸기밭 85반(反)과 포도밭 640반(反)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적지를 조사 중이며, 시 당국은 이에 대한 육성책으로 7만원을 보조해줄 것이다.'라며 '작년도에 딸기를 즐기려고 찾아온 외래객이 15만 명 정도였고, 딸기와 포도의 매상고도 489만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딸기밭 85반'의 '반'은 확실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농학자의 증언에 의하면 1단보(약 300평)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한 수원시에서 이 지역 농업인들에게 보조한다는 7만원과 매출액 489만원의 가치는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5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므로 대충 유추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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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밭-사진제공 이목동 유예식
 
1970년의 보도에 따르면 노송지대를 확장한다고 예고했는데 이는 계획 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후 74년엔 솔잎혹파리 병충해가 번져서 소나무 20그루가 몸살을 앓는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때 기사에 노송지대 소나무가 2백 2주라고 한 걸 보면 꽤 많은 노송이 살았던 것 같다. 사실 그랬다. 당시 이 길을 다녔던 사람들 증언이 한 결 같이 소나무 그늘로만 다녔을 정도였다니 소나무가 많기도 하였고 가지도 무성했을 것이다. 

수도권 명승지 노송지대

수원이나 인근 지역 및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이 이 노송지대를 즐겨 찾았던 데에는 딸기와 포도, 그리고 노송의 정취도 사람들의 감성을 일깨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도권에서 마땅히 갈만한 명승지도 적었으므로 이도 한몫을 했겠다.

1982년 1월과 83년 1월, 83년 11월과 84년 9월, 그리고 86년 6월에 이르기까지 신문에서는 계속해서 노송지대 소나무의 피해를 대서특필한다. 
매연공해와 관광객들의 손찌검에 노송이 시들어간다는 것과, 노송 보호 계획을 확정했다는 것, 그리고 영양실조 등과 행인의 손찌검으로 가지가 마르고 잎이 누렇게 변한다는 것을 보도한다. 그래서 해마다 3~4그루가 죽어가서 86년에는 86그루만 남았다고 보도하였다.

물론 소나무의 특성 상 자연사도 생겼을 것이고, 보도대로 매연 및 관광객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지역의 소나무를 두고 연이어 언론에 떠오른 것에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정조 임금의 효성과 연계시켜 수원을 효심의 도시로 확정지으려는 의도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딸기와 포도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인파에 비해 소나무가 점점 죽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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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지대를 지나는 능행차 행렬-사진 제공 이용창


인파로 가득찼던 노송지대

정말이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파장동 네거리부터 선경합섬, 그리고 이목동의 지지대고개 근처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봄의 딸기 철에는 그 유명한 수원딸기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수원 딸기의 특징은 양력 5월이 되어서 다른 지역의 딸기가 거의 소멸할 즈음 본격적으로 나왔다. 
표피가 다소 허연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래도 신맛이 나지 않고 단맛이 많았다. 또한 솔꽃 가루가 날릴 무렵이어서 딸기의 표면에 노란 가루가 붙어 더욱 특별한 맛이었다.

하기야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수원딸기로만 충당이 되지 않아서 다른 지역 딸기도 끼워 팔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는 포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노송지대만 딸기와 포도로 유명했던 것은 아니고 푸른지대(서둔동 서울대 농대 주변)와 안양유원지 부근도 인산인해를 이루기는 똑 같았다. 

놀이공간이나 휴식 공간이 절대 부족했던 당시에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상하면 요즘 수원화성에 찾아오는 인파와 겹치게 된다. 그만큼 수원화성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도 수원은 이름난 명승지라고나 할까?

전설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맛

노송지대의 딸기와 포도는 90년대 들어서 자가용의 보급에다 전국 각 지역에 산재한 농원으로 인해 점차 그 빛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대형 식당이었다. 
수원갈비의 명성을 기왕이면 노송지대에서 이어가려 하였고, 예식장과 수영장 등이 들어서면서 한때는 서로 상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점차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로 접어드는 2000년대에 와서는 그 노송지대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말았다. 

딸기, 포도와 음식, 그리고 술로 이어지던 노송지대는 이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옛 이야기가 되었다. 
노송 아래 줄지어 세웠던 역대 목민관의 공덕비와 송덕비도 박물관으로 옮겼고, 택지개발을 한다고 들씌운 울타리는 높기만 하다. 

그래도 배고프고 어려웠던 6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30여 년을 이어온 노송지대의 문화를 기억 속에서 지울 수는 없다.

노란 솔꽃 가루 묻은 수원 딸기의 맛과 포도 시렁 아래에서 따먹던 성긴 포도송이의 단맛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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