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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파장초등학교 참사를 잊지 말자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 18
2009-12-10 13:39:48최종 업데이트 : 2009-12-10 13:39:4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1973년 파장초등학교 참사를 잊지 말자_1
추모비 전면

1970년이 막 문을 연 1월 9일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후진국가에서 발전의 목표로 삼아 추진하는 운동이다. 7월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8월엔 남북 간 선의의 경쟁을 부르짖으면서 8.15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11월엔 평화시장 근로자였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하였다. 12월 성탄절엔 대연각호텔에 불이 나서 16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듬해인 71년엔 김대중씨를 꺾은 박정희씨가 제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은 어땠는가. 7.4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비상계엄 체제로 나라가 온통 '비상'이었다. 아침마다 마을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노래가 확성기에서 울려 퍼졌다.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12월엔 서울시민회관에 불이 나서 50여 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두 해 연속 12월에 큰 화재 사건이 난 셈이다.

1972년 5월 수원 팔달산 중턱에는 1년여 동안의 공사 끝에 강감찬장군의 동상이 제막된다. 그리고 화성 성곽 시설물 등 문화재 20여 점에 6천만 원을 들여 보수하기로 결정한다. 
7월엔 이목동의 노송지대에 줄지어선 노송 50여 그루가 대형화물차에 받혀 횡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정조임금이 아버지를 찾아 애절하게 오가던 길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슬픔이 컸다. 이 사건이 전조였을까? 이듬해인 73년 파장초등학교에선 대형 어린이 참사가 일어났다.

70여 년 역사의 파장초등학교엔 큰 슬픔이

1937년 문을 연 파장초등학교는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파장동은 물론이요, 정자동과 송죽동, 이목동과 상광교동, 천천동과 율전동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였다. 그러니 먼 곳에 사는 어린이들은 10 리도 넘게 걸어와서 공부하고 되돌아가곤 하였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당시에는 대부분의 초등학교가 그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것도 어려웠다. 부모의 생업이 농업일 경우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않겠는가?

【수원】22일 낮12시35분쯤 수원시내 파장국민학교(교장 김팔복·56) 4학년과 6학년 어린이들이 자유학습시간을 맞아 학교뒤뜰 확장공사 작업을 하던 중 3m높이 흙 언덕이 무너져 어린이 7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6학년3반 권오석군(13)등 14명이 부상, 10여명이 묻혀 있어 구조작업 중이다. 이들 학생들은 「자유학습의 날」인 이날 1교시가 끝난 후 뒤뜰 확장공사를 돕기 위해 작업에 나섰다 변을 당했다. 사고가 나자 현지 경찰관·예비군이 긴급 동원돼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피해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정선영(6의3) ▲윤석범(4의4) ▲조면호(4의3) ▲정동욱(15· 6학년)외 3명
◇중상자 ▲노채원(11·수원시 정자동529) ▲이용이(11·파장동309) ▲임지용(12·광공동132) ▲고학배(11·6의4) ▲이종하(10·4의2) ▲문윤수(11·4의2) ▲윤태구(11·4의2) ▲조재호(11·파장동324) ▲김상복(11·4의2) ▲김만기(11·이목동245) ▲김수복(11·4의4) ▲이경수(13·6의3) ▲권오석(13·6의3)

중앙일보 1973년 9월 22일자 기사 전문이다. 중상자 가운데 사망자가 더 나와서 모두 9명의 어린이가 하늘로 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973년 파장초등학교 참사를 잊지 말자_2
파장초등학교 전경/교육청 홈페이지

파장초교는 한국전쟁 때 교실이 불에 타서 다시 지었는데 기초는 콘크리트로 했지만 벽체 등 나머지는 목재로 지은 건물이었다. 교실 바닥은 마루로 되어서 정기적으로 기름칠을 해 반짝거렸고 어떤 교실에서는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새 교실을 옛 교실 뒤편 언덕에 콘크리트와 벽돌로 다시 짓고 옛 목조 교실은 무너질 위험 때문에 철거하였다. 그러나 기초 부분의 콘크리트는 쉽게 철거하지 못해 방치하였다. 아이들은 건축 쓰레기를 파헤쳐 마루 틈으로 떨어진 동전과 연필을 줍기도 하였다. 어쩌다가 죽은 동물의 잔해를 보고 놀라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어린이 참사


학교에서는 이 옛 교실 기초부분을 모두 흙으로 메워 화단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흙은 새 교실 뒤편의 야산에서 퍼 오기로 하고 어린이들을 동원하였다. 집에서 못 쓰는 양동이나 대야 같은 것을 가져와서 흙을 나르도록 하였다. 
어릴수록 흙장난을 좋아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흙을 나르는 노동도 놀이로 삼은 듯이 열성이었다. 게다가 야산에서 흙을 팔 때 아래쪽만 후벼 파면 위쪽의 흙들이 저절로 무너지는 원리를 이용하였다. 이것이 지나친 것이다. 깊게 파 들어가서 마치 작은 동굴처럼 되었을 때 위쪽의 흙더미가 무너진 것이고 안쪽에 들어가서 흙을 파내거나 나르던 어린이들이 매몰되었다.

파장초교의 어린이 참사는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한 달여 전에 일어난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뒤로 밀릴 지경이었고, 교장이 구속되고 교감과 담임들은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대책위 위원장인 교육장까지 직위해제 되었다. 어린이 사건과 사고가 빈번한 요즘이다. 어른들은 보다 철저하게 어린이를 돌봐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책임과 의무이다.  

1973년 파장초등학교 참사를 잊지 말자_3
추모비 뒷면
 
【수원】파장국민학교 매몰사고 수습대책위 (위원장 권수원)는 26일 하오 희생 학생 부모들(대표 조재필·37) 과의 위로금 지급 협의 끝에 1인당 장례비 5만원과 수원시 교육청에서 50만 원, 각계 성금에서 2O만 원 등 모두 75만원씩을 지급키로 타협을 봤다. 

참사 닷새 뒤인 9월 27일자 중앙일보 기사이다. 
어린 꿈나무들의 희생을 돈으로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지금도 피해 어린이들의 부모 가슴은 숯덩이로 남았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안전'이라고 하지만 어린이들의 안전은 더욱 강도 높게 도모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 주차장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다 보면 중턱에 선 추모비를 만난다. 겨울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마음이 더욱 애잔해지는 현장이다. 꽃인 듯 떨어진 단풍잎들이 그나마 어린이들의 외로움을 달랜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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