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벽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화성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 19
2009-12-18 14:27:19최종 업데이트 : 2009-12-18 14:27:1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우리나라 벽돌의 역사

벽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화성_1
팔달문 옹성

벽돌은 점토를 틀에 대고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것을 말하는데, 전(塼)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 벽돌을 쓴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지안의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 벽돌이 발견되었고, 당시의 발달된 기와와 그 문양은 벽돌의 사용도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가 전으로 작은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없고, 경주의 황룡사 터 일부에서 무늬 없는 벽돌이 깔린 곳이 발견되었다.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벽돌을 사용한 예가 대단히 많다. 
그중 가장 확실한 예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벽돌무덤 2기이다. 그중 1기는 1971년에 발굴되었는데, 동봉한 묘지석(墓誌石)에 의하여 523년에 세상을 뜬 백제 무녕왕과 왕비를 위해 조성한 분묘임이 밝혀져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특히 무녕왕릉에 사용한 벽돌들은 여러 가지 무늬를 지녔다. 그 가운데 반으로 자른 연꽃을 벽돌에 양각하여 두 장을 합하면 하나의 활짝 핀 연꽃이 되도록 고안한 것 등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백제에서는 또 실제 벽돌로 추정되는 유물과 지금의 보도블록 크기 벽돌도 다수 출토되었다. 여기에 연꽃무늬, 봉황무늬, 도깨비무늬, 산경무늬 등을 새겨서 그 용도에 상관없이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대변한다. 

통일신라에서의 벽돌 문화는 많은 수의 전탑이 이를 증명한다. 그중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5층 전탑에는 당초문이 양각되어서 발전된 벽돌의 형태를 보여준다.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경기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에도 신라의 무늬를 계승한 듯한 당초문이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청자의 발전으로 인해 청자전까지 만들어냈음을 알겠는데,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다량의 청자전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벽돌은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인 색채는 사라지고 새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주로 담을 쌓거나 문루를 세우는 데 벽돌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특수한 예라고 보겠으며, 통일 신라나 고려 초기처럼 무늬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경복궁 후원의 굴뚝들과  다른 궁궐들의 담장에는 크고 작은 벽돌들을 다양하게 사용하였고, 소나무, 국화, 학, 거북이 등 여러 문양을 따로 만들어 화판에 박아서 장식하였다.

화성건설의 중요 재료-벽돌 

벽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화성_2
방화수류정-서벽

화성은 축성 재료로 구분할 때 석전교축성(石塼交築城)인 것처럼 각 시설물에는 대개 벽돌이 들어갔다. 중요한 시설일수록 벽돌의 사용이 빈번해지는데, 벽돌을 가지고 성을 쌓거나 건물을 짓는 것은 화성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화성에서 벽돌 사용의 예를 살펴보면,
첫째, 옹성을 쌓는데 요긴하게 사용한다. 사대문의 옹성에 모두 벽돌이 들어갔다.
둘째, 공심돈을 쌓는데 잘 활용하였다. 위엄도 있으면서 실용적이며 아름답기도 하다.
셋째, 남수문 위의 포사를 평지붕(슬라브 구조)으로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넷째, 각루를 쌓는 데도 이용하였다. 특히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벽돌의 이용 가치를 훨씬 높여 놓았다. '벽체석연'이라고 해서 돌 액자 속의 벽면을 벽돌로 쌓은 최초의 건물이 되었고, 서쪽 벽의 '十' 자 무늬 꽃담은 세심함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간결함을 잃지 않은 수작이다.
다섯째, 암문을 건설할 때 벽돌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암문은 정문 못지않게 중요한 비상 통로이다. 튼튼하게 벽돌로 쌓아 지켜야만 성안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여섯째, 성벽 자체를 벽돌로도 쌓았다. 방화수류정에서 동쪽으로 북암문을 포함한 40보 구역을 벽돌로 쌓고 '벽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밖에도 봉동과 노대, 대포를 쏠 수 있는 포루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힘들만큼 벽돌은 화성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벽돌을 만들어 그냥 쓴 것만이 아니고 현장의 필요에 따라 갈아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마벽패장'이라는 기술 감독을 따로 두었다. 
화성의 건축가들은 낯선 재료인 벽돌을 가지고 새로운 건축물들을 훌륭하게 지어냈다. 이런 능력은 곧 우리 전통 건축의 범위를 한 단계 더 넓힌 업적이면서 화성을 건설하는 시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벽돌의 활용은 조선 전성기의 문화를 화성에서 아낌없이 발휘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벽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화성_3
벽성


벽돌로 쌓은 강화 외성
영조 18년(1742)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1676~1750)은 비만 오면 허물어지는 강화 토성을 고쳐 쌓게 해달라고 건의한다. 이미 두 차례의 청나라 사행길에서 본대로 그는 흙보다 견고한 벽돌로 개축하도록 허락 받는다. 2년 뒤인 영조 20년 김시혁은 강화 외성의 증축과 보수를 끝냈다고 보고한다. 얼마 안지나 특별히 김시혁을 발탁하여 한성부판윤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사헌, 공조판서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본래부터 능력이 좋은 문신이었지만 벽돌이 계기가 되어 인생의 말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셈이다. 

그러나 영조 29년(1753), 수만 냥의 재화를 들여 다시 쌓은 강화의 외성은 10년도 못가서 불행하게도 무너진다. 1744년이면 화성을 쌓기 50년 전이다. 이때 또한 문예부흥기여서 국운이 한창 뻗어나갈 때다. 그런데 벽돌로 성을 쌓는다는 새 기술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50년 뒤의 화성에서는 벽돌의 제도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같은 문예부흥기의 영조 시대에 제대로 쓰지 못했던 벽돌성의 제도가 그로부터 50년 후 화성에서 완벽히 구현된 것이다. 이는 조선 전성기의 문화 발전이 급진전되었음을 나타내는 결과이다. 벽돌로 인한 새 세상이 화성에서 활짝 열린 것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이 주창한 벽돌 사용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정조 16년(1792) 안의현감으로서 현청 앞에(현재 안의초등학교)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벽돌 가마를 만들고 시험 제작하여 건물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 실학자들은 벽돌의 적극적인 사용을 주장하였다. 청나라에서 벽돌로 쌓은 우물이나 집, 담장, 성곽, 구들 등을 보고 경탄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연암 박지원은,
"대부분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잘 터져 버리며, 돌을 등지고 들떠 일어나기 때문에 돌은 항상 외톨이로 돌아서 흙보다 나을 것이 없네. 벽돌을 석회로 때워 놓으면 마치 아교가 나무에 붙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덩이로 엉기어 굳은 성을 이룩하네. 물론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 비교할 수가 없네. 하지만 돌 하나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1만 개의 단단함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을 걸세."

이렇듯 화성의 건설에 벽돌을 다양하고도 이롭게 쓴 것은 북학파 실학자들의 견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비롯한 정통파 실학과 북학파 실학이 화성에서 아름답게 만나서 '꽃'을 피운 것이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