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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문화도 담긴 축만제(서호)
염상균의 수원이야기/22
2010-01-13 16:09:54최종 업데이트 : 2010-01-13 16:09:5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축만제는 왜 만들었나?

수원의 문화도 담긴 축만제(서호)_1
축만제와 농촌진흥청, 뒷산은 여기산/사진 이용창

정조 23년(1799)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화성의 서쪽에 축만제(祝萬堤)-일명 서호(西湖)-를 조성한다. 1795년 화성의 북쪽에 이미 축조한 만석거의 효과가 아주 좋았기에 이를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만석거의 혜택을 받는 대유평과 축만제의 수리답인 서둔(西屯) 평야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도시 화성을 위해 조성된 기반 시설이다. 이것도 사실 화성 성역의 일환이었지만 빈민 구제를 위한 토목 공사이면서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기반 시설이므로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한 프로젝트였다. 화성판 '뉴딜' 정책인 것이다. 
지난해의 가뭄과 기근을 정면 돌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농사 방법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용수의 확보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만석거와 대유둔(大有屯), 축만제와 서둔(西屯)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성을 성 밖에 쌓은 것이다. 
만석거와 축만제 등 저수지와 둔전은 화성을 지키는 또 하나의 성(城)이 된다.  '서쪽 둔전의 방죽에 물을 가두어서 북쪽 둔전의 논과 이어지게 하고 만석거와 통하게 하며 요충도로를 차단하여 앞쪽과 왼쪽에 물과 못을 두는 뜻을 가지게 된다.' 는 논리이다. 
성 밖에 힘들여 해자를 만드는 대신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적군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지상에 돌출된 성이 아니라 마이너스 성, 즉 땅 속에 성을 쌓은 것이라고도 하겠다. 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수원은 농업을 중시하고 시범적인 국영농장을 만들어 새로운 농법을 연구하고 실험했던 곳이다. 더구나 수원은 당시에 국토의 중간쯤에 자리하므로 여기서 얻어진 벼농사 자료는 북으로 갈수록 조금씩 낮추어 잡고 남으로 갈수록 조금씩 높여 잡으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원이 농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농촌진흥청이나 각종의 농업 관련 시험장과 연구소 등이 수원에 위치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건설은 1796년 9월에 끝나지만 화성 신도시의 진정한 완성은 1799년 축만제와 서둔의 설치라고 하겠다.

항미정에서 축만제를 바라보면

수원의 문화도 담긴 축만제(서호)_2
항미정/사진 이용창
 
축만제의 제방 서쪽 끝에는 날아갈 듯 정자 하나가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항미정이다. 
1831년 화성유수였던 박기수(朴綺壽)가 축만제의 풍치를 더욱 빛내고자 세웠다고 하는데 실제 이 정자로 인해 축만제와 항미정은 서로 빛내주는 존재가 된다. 본래는 화성 장안문 밖에 폐사된 건물을 옮겨지었다고 하나 어떤 건물을 옮겨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소동파(蘇東坡)의 '항주(杭州의 미목(眉目)'이라는 시구에서 따서 '항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도 서호가 있고, 그 호수 변에 '항미정'이라는 정자가 놓였다고 한다. 항주는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곳을 보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극찬한 곳인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한 중국 시인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서호가 없다면 항주에 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로 항주를 대표하는 명승이다. 그래서 축만제라는 본래의 이름보다 서호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지기도 하였다.

정자의 구조는 북에서 남으로 '一' 자형 4칸과 전퇴가 있는 건물에, 북쪽 끝에서는 서쪽으로 2칸의 공랑(空廊)을 붙였고, 남쪽 끝에서는 동쪽으로 1칸의 마루칸을  달았다. 지붕도 전면과 동랑(東廊)에는 팔작지붕, 서랑(西廊)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다.
항미정에 앉으면 화성이 있는 팔달산의 전경이 보이고 제방에 서면 호수에 비친 여기산의 모습이 절경이다.

명승고적 축만제에서 대중문화도 싹트다

수원의 문화도 담긴 축만제(서호)_3
축만제 제방-왼쪽에는 숙지산 오른쪽에는 팔달산이 보인다/사진 이용창

축만제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이 들어서면서 정조 시대의 농업 연구 기관을 이어받는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오늘의 농촌진흥청과 작물과학원 등이 들어섰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도 들어서서 학교 주변의 푸른지대가 유명세를 타게 된다. 

경향 각지에서 봄이면 푸른지대의 딸기를 먹으러 몰려들고, 가을이면 포도를 먹으러 인파가 몰려들었다. 여름이면 축만제 제방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수도권 최고의 유원지가 되다시피 하였고. 
모두 1970년대의 번성이었다. 딸기나 포도 철 즈음이면 서울대 농대에서도 축제를 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수만과 김창완 노래의 보금자리


지금은 연예제작자로서 아이돌그룹을 양산해내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씨도 서울대 농대를 다니면서 그 음악적 재능을 키웠는데, 음악서클인 '샌드 페블즈'의 2대 멤버이다. 
그가 즐겨찾아서 노래 연습을 하던 곳이 축만제의 제방 아래였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모든 것 끝난 뒤', '세월이 가면', '파도', '행복' 등의 노래로 유명세를 타더니 이름난 사회자로 활동도 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서는 연예기획자로 우뚝 섰다.

이수만씨보다 2년 아래의 김창완씨도 또한 서울대 농대 출신의 대중연예인이다. 
두 동생과 함께 '산울림'을 조직하여 '아니 벌써',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으로 197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가수였다. '아니 벌써'는 기존 가요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다시피 한 노랫말과 곡조로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지금은 노래보다는 배우로서 더 열심히 활동하지만 김창완씨도 역시 농대와 푸른지대, 그리고 축만제의 문화를 이끌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이제 서울대 농대도 옮겨갔고, 푸른지대도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인데다가 농촌진흥청과 관련 연구기관들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고 한다. 
오로지 축만제와 항미정만 남아서 중국 항주의 서호와 항미정을 대신해야 하는 것인가? 번잡했던 서호의 문화가 새봄에 새싹처럼 되살아나길 기원한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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