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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24
2010-01-27 16:39:52최종 업데이트 : 2010-01-27 16:39:5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봉화대와 봉수대
봉화 혹은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이다.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편제도와 전기통신이 생기기 전에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_1
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_1

역마나 인편 등의 연락 방법보다 빠르고 효과가 높아서, 지방의 형편이나 국경의 동태를 중앙 정부에 알리는 데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역마나 인편을 통한 통신이 개인적인 의사를 표시하거나 서신을 전달하는 것에 비해 봉수는 국가의 정치 군사적인 전보 기능이 그 설치 목적이었다. 

봉화는 원래 밤에 피우는 횃불(야봉夜烽)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널리 주수(晝燧-낮에 피우는 연기)까지 포함한 뜻으로 쓰여져 흔히 봉화라고 일컬었다. 더러는 주연(晝煙)과 야화(夜火)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했다. 야봉과 주수를 줄여 봉수라고 하였고 봉수를 피우는 곳을 봉수대 혹은 봉화대라고 하였다. 

육상과 해상 모두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1거, 왜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아군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육지로 상륙하면 5거로 하였다. 육지 봉수의 경우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하였다. 

TV 송신소와 봉화대


지난 1960년대 초 TV 방송이 시작되어 전파를 내보낼 때였다. TV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으로 국민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국민이 보다 빠른 시간에 이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할까 하고 고심한다. TV 전파 송신소를 많이 세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당시 우리의 기술로는 어느 곳에 얼마만큼의 출력을 지닌 송신소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잘 몰랐다. 산이 많은 나라여서 더욱 까다로웠던 것이다.

많은 금액을 요구한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기술자들이 송신소 건설에 대해 자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에 도착한 일본의 자문단은 너무도 단출한 모습이었다. 측량 장비며 첨단의 기계를 기대했던 담당자의 얼굴은 어느새 실망 섞인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따지듯이 묻는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송신소 건설 예정지를 찾을 것이며 어떻게 출력 등을 자문할 것이냐.

일본의 기술자들은 지니고 온 가방을 열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그 속에서는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옛 지도들이 나왔다. 옛 지도들이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주 보아왔던 터라 담당자는 시큰둥해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담당자의 얼굴은 아예 얼어붙었다. 아니 섬뜩한 마음을 추스르느라 한동안 말을 못했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옛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모두 봉수대 자리였기 때문이다. 한 방 크게 맞은 것이다.

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_2
사진/이용창

봉수대와 봉수대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도 가까워도 안 된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잘 보이지 않으므로 봉수의 의미가 없고, 너무 가까우면 그 효율성에 문제가 생긴다. 또 높은 산에 설치하면 좋을 것 같지만 구름 등에 가려 보이지 않을뿐더러 관리할 때도 문제가 많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높이를 지닌 산에 설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근 고을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이런 봉수대의 필요조건은 TV 전파와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는 TV 전파와 봉수대를 전혀 성격이 다른 별개로 보았고, 그래서 일본의 기술자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우리의 지도에 나와 있는 대개의 봉수대 자리에 송신소를 세워야 했다. 요즘엔 이동통신의 중계기가 설치되었거나 군부대의 통신소들이 봉수대 터 근처에 자리 잡아서 통신의 발달과 봉수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모든 땅은 그 용도가 따로 있다는 '각지위주(各地爲主)'인 것이다.

화성 봉돈의 생김새와 저녁뉴스

화성 봉돈에는 봉돈 자체의 방어를 위해 담을 두르고 무지개 문을 내었으며, 요원들이 숙직하며 일하도록 구들방 한 칸을 들이고 봉수에 필요한 기계 따위를 넣어두는 창고도 한 칸 만들었다.

저녁마다 5개의 화두 중 남쪽 끝의 첫째 화두에서 횃불을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의 육봉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흥천대에 있는 바다 봉수(해봉)에서 응한다. 이 밖의 4화두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흥천대의 바다 봉화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곧바로 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화성부의 서쪽 30리 서봉산 위에다 새롭게 샛봉화(간봉間烽)를 두었다.

화성 사람들은 저녁마다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봉수를 보고 편안한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화성에 앉아서 국경의 정보를 읽어내고 그 정보가 더구나 평온을 알리는 내용이라면 두 다리 쭉 뻗고 잠들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매일 저녁마다 봉돈에서 저녁뉴스를 보는 셈이다.
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_3
사진/이용창


화성 봉돈의 특징 다섯

화성 봉돈의 특징 중 첫째는, 자리 잡은 곳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봉수대의 생명은 서로 잘 보이는 곳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에 자리를 잡아야 멀리까지 정보를 전달한다. 그런데 화성의 봉수대인 봉돈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작은 언덕에 앉았다. 이는 기존 봉수제도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다.
둘째, 화성의 봉돈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서울 목멱산(남산)의 봉수가 전국에서 올라온 변방의 정보를 궁궐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처럼, 화성에서도 변방의 정보를 한눈에 보아야 한다. 화성에는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행궁이 있고 행궁에는 임금이 머무르는 임시 궁궐의 기능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는 곳에 봉돈을 설치한 것이다.
셋째,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군사시설물이다. 화성의 봉돈은 봉수대이면서 치성이고, 또한 치성이면서 공격용 진지이고 망루의 기능까지 겸한다.
넷째, 생김새가 참으로 아름답다. 봉돈의 안으로 들어가면 기능적인 요소들로 알차게 꾸몄지만 성 밖에서 보는 봉돈의 모습은 대단히 위협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곡선미를 갖추었다.
다섯째, 봉수를 올릴 때 인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아궁이(거구炬口)를 서로 마주보게 하였다. 그래서 다섯의 거구에 모두 불을 지피기 위한 인원은 세 명으로 충분하게 되었다. 

화성 봉돈과 TV송신소의 교훈_4
1920년대 봉돈모습-사진제공 이용창

화성의 봉돈은 단순히 봉수대라고 부르기에는 아까운 시설물이다. 봉화대 혹은 봉수대라고 부르는 통신시설에다 군사적인 목적으로서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추가했으니 당연히 봉수돈대라고 불러야 한다. 즉 봉수대이면서 공격용 진지인 돈대이다. 그래서인지 '봉돈'이라는 기막힌 이름으로 압축하였다. 이 압축 능력과 복합적인 시설물을 완벽하게 만들어낸 능력이 당시의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가늠하는 한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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