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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 전설이 되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27
2010-02-18 13:19:00최종 업데이트 : 2010-02-18 13:19:0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 전설이 되다 _1
60년대 화춘옥-수원박물관 재현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은 단연 소갈비구이이다. 다소 비싼 게 흠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먹는 갈비와는 그 맛이 현저히 다르고 양도 많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을 찾는 외국인들도 수원 갈비를 즐겨먹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이제는 수원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바로 '수원갈비'가 되었다. 오늘날 수원에는 30여 곳의 대형 갈비전문점들이 동서남북에서 성업 중이다. 그러나 그 효시는 누가 뭐래도 '화춘옥(華春屋)'이다. 아니 화춘옥을 빼고는 수원갈비를 거론할 수 없다.

화춘옥의 전신은 화춘제과점

화춘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이귀성과 그의 형 고 이춘명 형제는 수원 영동시장에 '화춘제과점'을 연다. 이 제과점에서는 요즘도 많이 먹는 부채과자 같은 서양과자들을 만들어 제법 재미를 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밀가루, 설탕, 기름 등 재료가 부족해 위기를 맞는다. 더구나 형제가 한 가게에 매달리다 보니 점점 더 어려워져서 부득이 분가하게 된다. 형은 그대로 화춘제과점을 운영하고, 본래 과자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동생 이귀성씨는 '화춘옥'을 차려 독립하게 된다. 이때가 1945년 10월이나 11월경이라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화성'에서 '화'자를 따오고, 이춘명에서 '춘'자를 취해 화춘제과라고 했던 전통을 그대로 살려 화춘옥이라는 음식점을 연 것이다. 
그러나 화춘옥이 처음부터 갈비를 주메뉴로 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갈비를 비롯하여 해장국과 설렁탕, 육개장, 비빔밥, 냉면 등 보통의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음식 맛이 좋고 인심이 후해서 장사는 그런 대로 잘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귀성에게 과자만 잘 만드는지 알았더니 음식 솜씨도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음식 솜씨가 좋고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으며 박리다매하겠다는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화춘옥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그런데 해장국에 소갈비를 듬뿍 넣어 끓여내고, 갈비에 양념을 한 다음 숯불에 구워내 넉넉히 주어서 사람들은 많이 몰렸지만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귀성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지병인 당뇨에 시달리게 된다. 
화춘옥은 당시 수원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들이 맡아서 운영하게 된다. 그는 공무원 출신답게 체계적이고 꼼꼼한 경영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손맛을 더해 화춘옥을 정상화시킨다. 이 손맛은 창업자의 손자로 이어지지만 화춘옥은 지금 휴면 상태이다.

고 박정희 전대통령도 즐긴 화춘옥 갈비

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 전설이 되다 _2
수원갈비-이용창 사진

1950년대 서울에서 통금이 풀리는 4시30분경에 출발하면 수원에 5시 30분쯤에 도착하고 화춘옥에서 해장국을 먹고는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들러 갈비를 먹고 서울로 가는 것이 당시 사냥꾼들의 코스였다고 한다. 
이때 아직 소장인 박정희씨도 사냥을 다녔으며 역시 화춘옥을 애용하였다. 그는 뒷날 혁명에 성공한 다음 지방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자동차를 돌려 화춘옥 갈비를 먹고 간다. 
이후부터 혁명 주체세력들이 자주 찾게 되고 박정희씨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경기도청에 올 때마다 이용, 화춘옥은 그만 비상이 걸린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하루 전에 미리 와서 갈비에 양념하는 것을 감시하고 냉장고에 넣는 것을 확인한 다음 봉인까지 하였으며, 혹시라도 누군가가 바꿔치기 할까 두려워 교대로 지키며 밤을 새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오는 당일 예정 시간 즈음에는 새로 오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게 하고 손님들은 먹는 대로 나가게 하는 등 보안 유지에 철저하였다. 그래서 대통령이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 그 자체가 뉴스 거리였던 당시에 9시 라디오뉴스를 타고 화춘옥 갈비 저녁이 그대로 보도되었다. 
이는 다른 손님들을 내보내면서 대통령 일행에게 판 것보다 효과가 커서, 즉 공쳤다고 생각한 것보다 그 홍보 효과가 훨씬 더 커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수원을 방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화춘옥은 경향각지의 유명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명소가 되었다. 
그때는 암소갈비가 주종을 이루어 수원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암소를 사러 다니는 전문 구매자가 3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수원갈비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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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갈비-이용창 사진

화성이 이루어진 시기가 조선의 전성기였고 그 전성기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처럼 화춘옥의 전성기도 계속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게 되면서 여기저기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대 사장은 1979년 화춘옥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 임대하였는데, 그때 화춘옥을 임대 받아 운영한 사람이 뒷날 '삼부자갈비'를 열었고 그 집안에 의해 화춘옥갈비는 '수원갈비'로 대중화되었다.

수원갈비 즉 화춘옥갈비의 특성은 양념을 할 때 간장으로 간을 맞추지 않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데에 있다. 갈비의 고소한 맛을 담백하게 살리기 위한 것이다. 또 화춘옥은 갈비를 한 번 구워 손님상에 내는 걸로 유명하였다. 큰 화덕에 숯불을 넓게 피우고 커다란 석쇠를 얹은 다음 주문에 따라 초벌구이를 한 후 가져다주므로 취향에 따라 그냥 먹어도 되고 상에서 더 구워 먹어도 되었다. 

수원화성이 우시장을 발전시키고 

수원화성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안성의 장시가 더 활발하여 '안성마춤'이 활개를 쳤지만, 수원 상인에 대한 특혜로 안성장은 그 명성을 수원에 하나씩 내주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우시장이었다. 수원은 안성보다 서울에 훨씬 가까우므로 우시장이 특히 발달한다. 이는 역시 정조 때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오가기 위해 새로 닦은 원행(園幸)길과도 연결된다. 즉 삼남으로 가는 지름길이 수원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농업 활성화 정책도 수원의 발전과 우시장의 발달, 그리고 수원 갈비에 영향을 미친다. 
화성 주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고 만석거, 축만제 등 저수지를 축조하여 안정되게 농업용수를 공급한 것이다.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해서, 또 성을 수리할 때 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둔전(屯田)도 경영한다. 

새로 난 원행로를 따라 새도시 화성에 흘러든 농민들은 농사를 열심히 지어 국왕의 농업정책에 부응하고, 국왕은 화성의 건설이 끝나자 건설 과정에서 부리던 소들과, 내탕금을 내려 더 구입한 소들을 합해 농민들에게 내려준다. 
1년 도지로 소 한 마리 당 쌀 20말을 내게 하는 조건이면서 3년 안에 송아지 한 마리로 갚는다는 약조였다. 

새 도시 화성에서 새 농민들이 농사짓는 가운데 소의 거래가 활발해지고,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삼남으로 가는 길목에, 원행로와 안성장시의 부분적인 흡수 현상까지 일어났으니 수원장시와 우시장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원갈비의 명성은 이미 정조 시대에 그 기틀이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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