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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에 다산 선생이 없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28
2010-02-25 14:44:44최종 업데이트 : 2010-02-25 14:44:4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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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동상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다. '목민심서', '흠흠신서','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술이 말해주듯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없을 세계적인 인물인 것이다. 게다가 수원에서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다산의 기본 설계로 이루어진 만큼 더욱 각별하게 모셔야 할 인물이다.

기본에 충실한 다산 정약용

다산은 자신이 늘 지켜야 할 일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
첫째는, 동 트기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근면을 생활화하자는 것이다. 누구인들 일찍 일어나고 싶겠는가만, 자신의 의지로 새벽에 일어나 하루의 삶을 이끌어간다면 이끌려가는 삶보다 풍요롭지 않겠는가?

둘째는, 무엇이든 기록하는 것이다. 자세한 기록만이 자신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대로 실천하였다. 다산이 여러 차례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던 것도 자신의 숨김없는 기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기록정신이 수많은 저술을 남기는데 기본이 되었으니 다산의 삶은 기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먹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이라는 것은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므로 맛이 있거나 보기 좋거나 한 것에 너무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은 제 아무리 산해진미라고 하더라도 입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세상에 다시없는 추물이 되므로 입술만 속이면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며 하늘과 땅을 속일 수 없고, 부모형제를 속일 수 없으며, 세상 어느 것도 속여서 되는 일은 없지만 오직 하나 입술만 속이자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입술에는 눈이 없으므로 입술을 속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나라 사정에 걸맞은 음식관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 기본이 위대한 사람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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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생가


훌륭한 부모의 교육이 다산을 만들고

다산이 태어나던 해(1762)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다산의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후손이어서 고산 집안은 다산의 외가가 된다. 
고산 윤선도는 시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또 학자로서 이름을 드날렸고, 고산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는 그림으로 일가를 빛냈다. 공재의 손녀가 다산의 어머니 윤씨이고. 이런 외가의 전통 때문일까? 다산은 시에도 능하고 그림 솜씨도 좋았다. 그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사상이야 중언할 필요도 없고.

고산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이미 꼽아 놓은(1659) 장소에 사도세자의 묘소가 옮겨오게(1789) 된다. 당시 사도세자의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사용한 배다리는 다산의 고증에 의해 놓은 것인데, 이를 더욱 발전시켜 1795년 을묘원행 때 더욱 요긴하게 사용한다. 다산과 정조, 그리고 수원화성과의 인연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듯하다. 

뿐만 아니라 화성의 기본 설계인 '성제城制'를 다산이 확립하였는데, 이는 다산의 능력을 알아주고 계발한 정조의 안목도 만만치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이렇듯 아름답게 만나서 세계의 문화유산 '수원화성'을 창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성제'는 훗날 정조임금의 '어제성화주략'으로 기록된다. 어찌된 일일까? 국왕이 신하의 '논문'을 표절한 것일까? 

수원화성에 녹아든 다산의 실학 

다산은 또한 화성 성역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거중기(擧重器)와 녹로 등 요즘의 크레인과 같은 장비를 개량하였다. 그리고 화성의 공격과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오성지(五星池)와 현안(縣眼), 각루(角樓) 등의 제도도 보완하거나 새로 만들었다. 다산은 이렇게 화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을 가졌다. 그래서 다산 없는 화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일이다.

수원화성에 다산 선생이 없다?_2
다산 묘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화성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다산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승하한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에게 정적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집의 당호도 여유당(與猶堂)으로 바꾼다.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조심하고 사방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경계한다는 뜻의 '도덕경' 구절을 떠올렸던 것이다.

수원화성에 다산이 없다

7개월 남짓 조심스럽게 지내던 다산은 마침내 투옥되고 만다. 다산과 집안 식구들이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한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였다. 1801년의 신유사옥은 이후 다산에게는 족쇄가 되어 18년간을 옥죄게 되어 남도로 가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는 신유사옥이 벌어진 다음인 1801년 9월에 출간되었다.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화성성역의궤'에서 의도적으로 빼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다산의 '성제'는 임금의 작품으로 돌려놓고. 

그 방대하고 상세한 기록에 다산과 이가환 등 신유사옥에 연루된 사람의 이름이 모두 빠진 것이다. 이가환은 당시 공조판서였으므로 어떻게든 화성 건설에 이바지 했으련만. 안타까운 역사이다. 
긴 유배로 인해 다산학이 정립되었지만 다산 개인의 명예는 누가 회복시켜 줄 것인가. 화성 주변의 공원에 다산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는 것은 어떨까?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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