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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율전동 밤밭두부
염상균의 수원이야기-3
2009-08-11 10:59:10최종 업데이트 : 2009-08-11 10:59:1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시 율전동은 이제 도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30여년 전만해도 수원의 외곽 농촌이었다. 다만 경부선 철로가 관통하고 수원 인천간 산업도로가 만들어지면서 도시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가 건설되는 시기였고 수도권전철 1호선 율전역(성대역)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지금의 면모로 차츰 변화하게 된다. 

전설이 된 율전동 밤밭두부_1
사진/조형기

율전동이라는 이름보다 '밤밭'이라는 소박한 이름이 더 정겹고 쉽게 통하던 시절이었는데 마을을 관통하는 철로로 인해 윗밤밭과 아랫밤밭으로 크게 나뉘었다. 
밤밭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에서 밤이 많이 나서 붙인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을의 노인들도 밤나무가 우거진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하고 인근 지역의 이름과 비교해 보면 한 흐름이 잡힌다. 바로 옆 동네인 이목동에서 파장동, 송죽동과 조원동, 지금은 없어진 시목동까지는 서로 길게 이어지는 마을들이다. 
그런데 마을 이름들에 조율이시(棗栗梨柿)가 들어가서 제수용 과일이 모두 포함되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들어가는가 하면 정조임금의 파초 그림에서 보듯이 '파초의 장원' 파장동까지 한 벨트로 이어진다. 이는 '화성'을 건설한 다음 외곽 지역의 마을들에 역할을 분담시킨 것으로 보인다. 현륭원(융릉) 제사 때나 화령전과 향교 등 제향 때 마을 이름대로 조율이시 등의 조달을 책임지게 했던 것 아닐까?

밤밭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6,70년대 국회의원의 시골마을에 대한 공약은 늘 시내버스를 운행하게 한다는 것이 첫째여서 하루에 한 대 들어오던 것을 두 대나 세 대로 점차 늘려준다는 것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내버스 운행에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꼭두새벽에 들어오는 '두부차'였다. 당시의 수원여객 버스 중에서 가장 먼저 운행하는 첫차였는데 그 '두부차'도 국회의원의 압력으로 운행되었겠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없고서야 어디 상상이나 했으랴?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의 '두부다라이'-함석으로 네모나게 만든-를 포개어 싣고 사람들은 틈새에 앉거나 서서 '시내'로 나와 자기 구역에 맞춰 하차하였다. 주번을 서게 된 중고등학생도 가끔은 이용하는 버스였다. 한때 '밤밭'하면 '두부'로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버스안내양이 있던 시절에도 두부차에는 남자조수가 타서 그 무거운 두부상자들을 싣거나 내려주었다. 그것도 하차 순서에 맞추어야 했으므로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전설이 된 율전동 밤밭두부_2
사진/조형기

밤밭, 그 중에서 아랫밤밭은 왜 두부로 유명해졌을까? 농토가 적은 윗밤밭에 비해 아랫밤밭은 농토가 넓었다. 그러나 수원의 외곽이어서 돈이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윗밤밭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직장에 많이 다녔고, 아랫밤밭 사람들도 더러는 직장에 다녔지만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 한 집 두 집, 집에서 만들어먹던 두부를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한 것이 밤밭두부의 시초이다. 농촌에서 한 푼의 돈이 아쉽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힘은 들지만 돈이 되는 일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한 두 집이 열 집으로 늘어나고 이내 스무 집으로 늘어나니 관청에서나 정치인들이나 관심을 기울일밖에 없었다. 두부차가 들어오기 전에는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농촌진흥청까지 간 다음 버스를 탔으니 그 수고야 말해 무엇하리!

각자 집에서 맷돌로 갈아 무쇠솥에 끓여내 만들던 두부는 그 틀도 제각각이어서 두부 크기가 들쭉날쭉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우선 두부틀을 규격화하면서 맷돌을 대형 전기믹서로 대체하였다. 다만 믹서를 사용하는 요금을 받아서 적립하여 고장에 대비하고 믹서의 댓수를 늘리는데 쓰기로 한다. 그러다가 점점 탄력을 받으면서 마을사람 50여 명이 주주가 되어 소정의 투자금을 걷어 공장을 설립하는 등 두부사업을 이끌어간다. 
이때는 또 새마을운동과 맞물리면서 농촌 소득증대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으므로, 두부의 생산 판매에다 부산물로 얻어지는 비지와 간숫물로 소를 먹여 키웠다. 이중 삼중의 경제 효과가 창출된 것이다. 

1977년 경기신문(현 경인일보)에는 '경기의 부촌'이 시리즈로 연재되었는데 아랫밤밭이 두부와 비육우로 부촌이 되었다고 소개하였다. 한 집 당 1년에 190만원의 평균 소득을 올려 집집마다 TV가 있으며, 회원 56명이 협업하여 하루 5000모의 두부를 생산한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때는 마을회관에 보일러도 설치하여 각자가 공장에 와서 자기 두부를 직접 만들어가던 때였다. '새마을두부공장'이라는 이름도 걸고 두부틀에는 '밤밭'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가 밤 모양 무늬를 새겨서 '밤밭두부'의 브랜드 가치를 확실히 하려던 시기다. 수원시내에서 버스나 택시, 자가용을 타고 온 사람들이 동네 구멍가게에 줄지어 앉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방금 나온 순두부에 양념장을 뿌려 먹으면서 곁들인 막걸리나 소주! 또 청포묵과 도토리묵, 메밀묵과 심지어 콩나물까지 생산하던 식품 마을이 바로 밤밭이었다. 

한편으로는 배가 통통하게 살진 한우를 집집마다 2~3마리씩 키웠는데 1년에 3회전을 하여 수원우시장에서 사고팔았다. 1977년 당시 230여 마리의 소를 3회전 하면 1400여 마리가 수원우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수원우시장의 소 값은 아랫밤밭에서 좌우한다는 전설도 생겨난다.

전설이 된 율전동 밤밭두부_3
사진/조형기

그러나 이제 밤밭두부는 전설이 되었다. 마을은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도시가 되었고, 토박이 두부장수들은 하나 둘 그만두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이어갔다. 그리고 가동이 중단된 공장마저도 이젠 아파트를 짓기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때는 수원의 두부시장을 절반가량 섭렵했고 우시장을 석권했던 '새마을'이 또 다른 새마을로 탄생하려는 것이다. 아! 이것도 순환이며 윤회인가? 그 뜨끈하고 고소한 두부에 김치를 싸먹던 맛이며 순두부의 뭉글뭉글한 맛과 그보다 더한 밤밭의 인심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

 

염상균, 밤밭, 두부, 조율이시, 정조, 수원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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