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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문을 아시나요?
염상균의 수원이야기-5
2009-08-26 17:07:14최종 업데이트 : 2009-08-26 17:07:1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남수문을 아시나요?_1
없어지기 전의 남수문

남수문은 북수문(화홍문)의 짝이다. 그런데 화성을 자주 다니는 수원시민들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남수문은 화홍문에서 900미터 쯤 내려온 곳인 지동시장 근처에 놓였었다.

또한 창룡문에서 길게 뻗은 동쪽 성을 따라 팔달문으로 가다보면 봉돈을 지나고 동남각루를 지나 성의 방향이 서쪽으로 꺾이게 된다. 성을 따라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갑자기 성벽이 끊어지면서 개천이 앞을 가로막는데 이 주변이 남수문의 자리이다. 

그렇다. 남수문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화성에 없다.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떠내려가서 아직도 짓지 않았 다. 당시 화홍문은 다시 지으면서 남수문은 왜 다시 짓지 않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남수문만 남았으면 화성은 한 층 더 아름다웠을 터인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 수문을 지녔다.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당시 일곱 개의 수문도 흔치 않았을 터인데 아홉 개의 수문을 갖추었다는 것은 화성의 품격을 높이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입는 가장 높은 격식의 복장이 구장복이요, 세자의 그것이 칠장복이었다. 또한 숫자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다.

남수문도 화홍문과 같이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기도 하고 자물통으로 잠그기도 하였다. 다만 각 수문의 크기는 화홍문보다 작았다. 

구간수문의 훌륭한 돌다리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건축가는 이 돌다리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나머지 둘에는 다리의 길이만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하였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으로 많은 군사가 들어가 적군을 향해 공격하도록 했는데 검은색 벽돌로 만들어져 그 위엄이 대단했을 것이다. 더구나 57개의 총포 구멍이 성의 남쪽으로 났으니 적군은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포사 위로는 일반 성과 마찬가지로 여장을 두르고 총구멍을 내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으며, 구간수문에 맞추어 여장의 모습도 무지개형(반원형)으로 쌓았다. 

남수문을 아시나요?_2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남수문 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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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문을 아시나요?_3
남수문 외도


포사의 평평한 지붕 위에서 여장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거나, 포사 속에서 총포를 쏠 수도 있었으니 남쪽 성의 물길 방어는 거의 완벽했을 것이다. 게다가 새까만 벽돌이 첩첩이 쌓여서 주는 시각적인 효과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비치게 마련이다. 적군들의 가슴은 새가슴이 되었을 것이다.

북수문과 남수문은 갑인년(1794) 2월 28일 아침 장안문, 팔달문과 동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파고,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고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석(장댓돌)을 물리어 굳혔다."

남수문에 시설된 포사는 슬라브형 구조였다. 가로는 다리의 길이와 같은 동서 약 28.6미터이고 세로는 남북 약 3.6미터의 대규모 건물이어서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무나 돌은 사용하지 않고 다만 벽돌을 쌓아서 꼭대기를 평평하게 하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슬라브 건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화성의 시설물들 중에서 팔달문, 장안문, 화홍문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비용이 많이 들어간 건물이 남수문이다. 그런데 작은 시설물에도 대개 상량문을 남겼고 상량 날짜가 기록되었는데 유독 남수문만 상량문도 상량 일자도 없다. 이는 슬라브 건물이기에 상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황 증거이다. 

남수문의 공사비는 3만446냥 7전 9푼이 들었는데 화홍문과 비교하면 500냥 가량이 적게 들었다. 그러나 창룡문과 화서문의 공사비가 12,000냥 내지 1만3000냥인 것에 견주면 두 배가 넘게 들어갔다. 아마도 벽돌을 많이 써서 비용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실험적이고도 서구적인 슬라브형 구조를 채택하여서 그런지 남수문은 빗물 방수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수원에 살았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수문에도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지만 강수량이 많은 우리나라의 형편에 맞추어 지붕을 해 달고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시기는 1848년일 수도 있고 그 이후일 수도 있다.

북수문과 남수문 모두 상류에서 무지개 문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 즉, 무지개문과 무지개문 사이 바닥에는 큰 오각기둥의 화강석을 받쳐 놓았다. 마치 뱃머리처럼 돌을 다듬었는데 물살의 흐름이 구조물에 입히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화성의 건설보다 앞서 건설되었던 다른 돌다리들은 대개 사각기둥을 45도로 돌려놓아 물살의 흐름을 갈라 주었는데 화성의 북수문과 남수문에서는 이렇게 오각기둥 형태로서 물살의 흐름도 갈라놓고 구조적으로도 안정감을 확보한 것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 안쪽을 보면 긴 천장의 모양도 무지개처럼 아치(arch)를 그린다. 이 또한 홍수가 났을 때 물살의 흐름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게 하는 장치라고 보겠다. 또 수문의 바깥쪽에는 쇠살문을 설치하였다. 수문을 통해 드나들지도 모르는 적군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갑자기 홍수가 나면 쇠살문에 나뭇가지들이 끼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수문 자체에 심한 압력이 가해져 결국 수문이 무너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런 비상사태와 살문을 여닫는 편리를 위해 원격 조정 장치를 구비했다. 다리 위에서 쇠살문과 연결된 쇠사슬로 문을 여닫을 수 있게 하고 자물쇠로 쇠사슬을 잠글 수도 있게 한 것이다. 원시적인 리모컨을 시설한 셈이다.

최근에 남수문을 복원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하천에 변화가 많았던 탓인지 그 유구를 찾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어려움이 많더라도 남수문을 복원하면 좋겠다. 북수문의 짝도 찾아주고 남수문의 멋진 자태도 얼른 보고 싶으니.

북수문의 상량문 말미에,
"화홍문은 영원히 보존되어 흐르는 시냇물처럼 쉼이 없기를"
이라고 쓴 것처럼 북수문인 화홍문도 잘 지켜서 오래오래 보존해야겠지만, 떠내려간 남수문을 복원하는 일도 더욱 중요한 일이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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