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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북중 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6
2009-09-09 11:50:35최종 업데이트 : 2009-09-09 11:50:35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북중 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다_1
수원북중 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다_1

"학교운동장을 스케이트장으로 전용 겨울방학을 이용한 시내 초· 중· 고생들의 체력연마장으로 개설한 학교가 있어 이채. 수원북중학교(교장 이병구)는 학교운동장 3천여 평에 물을 넣어 영하의 날씨에 자연빙질로 된 '아이스링크'를 만들어 지난 20일부터 겨울방학 동안 겨울빙상학교를 개설하고 고정지도원을 배치 학생들을 지도하는 등 시내 초· 중· 고 스케이터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데 얼음이 녹아도 사고 위험이 없어 학생들이 마음 놓고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게 됐다."

35년 전인 1974년 12월 26일 경기신문(현 경인일보)에 '수원북중 교정에 스케이트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이다. 
당시의 겨울은 요즘보다 훨씬 추워서 얼음도 잘 얼었을 것인데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운동장 흙을 이용해 둑을 쌓고 물을 받아 놓기만 하면 저절로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아이스링크'용 물은 학교 뒤 담장 곁을 흐르는 물로 채웠다. 그 물은 사실 광교저수지에서 흘러와 북중학교와 맞붙은 수원농고(현 수원농생명과학고) 실습장에서 요긴하게 쓰던 물일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물의 쓰임새도 적을 터이니 도랑을 북중학교 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운동장에 물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얼음장사도 했던 정약용 선생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었던 36세의 정약용 선생은 추운 지방의 특성을 살려 가로와 세로 3미터 깊이도 3미터 쯤 땅을 파게 해서 샘물을 받는다. 물론 구덩이 바닥과 벽에는 기름종이를 붙여 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았다. 물을 한 자 남짓(30센티미터 가량) 받아 얼린 다음에는 또 기름종이로 켜를 나누고 또 받고 얼리고를 반복한다. 이윽고 구덩이 전체가 얼게 되면 볏짚 등으로 잘 감싸서 얼음이 녹지 않게 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구덩이에서 얼음을 꺼내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에게 제공하거나 고을의 대소사에 쓰고 이웃 고을에 팔아 그 이익은 곡산부의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가히 실학자다운 기지라고 하겠다. 수원북중의 스케이트장도 따지고 보면 그와 비슷한 일이었다.   

겨울방학이 되면 늘 1월에 전교 스케이트대회가 열렸다. 그때만 해도 스케이트 값이 비싸고 빙상장이 적어서 대부분은 논이나 저수지 등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수원역에서 농촌진흥청으로 가는 육교 옆 스케이트장이 규모가 꽤나 컸는데 돈을 내야 했으므로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몇몇을 제외한 대개의 학생들은 들러리를 설 수밖에 없었고 추운 날씨에도 모두 나와서 자기 학년이나 반의 선수를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도 기량이 특출한 학생이 더러 보여서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을 느꼈다.  

얼음판 붕괴 사고로 아수라장

어느 겨울이던가. 예정된 대회 날이 다가왔는데 얼음이 신통치 않았다. 아주 단단하게 잘 얼었으면 좋았으련만 날씨가 돕지 않아서인지 얼음의 두께가 얇았던 것이다. 그래도 대회를 하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체육교사 의견대로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단거리 대회가 모두 무사히 끝나고 장거리 대회를 시작할 때 그만 일이 벌어졌다. 
백여 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모두 출발선에 서서 총성을 듣자마자 출발할 때였다. 도움닫기를 위해서 모두들 발을 빠르게 움직였는데 그만 얼음이 꺼지고 말았다. 얼음판에 섰던 선생님들이며 학생들 모두 물에 빠졌다. 그 스타트 라인은 하필 운동장의 가장 낮은 곳이어서 대부분 허리까지 빠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급히 수습하여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교무실에 들어가 난로를 활활 달구어가며 옷을 말렸다.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북중학교의 겨울 스케이트장 개설은 중지되었는지 모른다.

전설 같은 권수원 교장

스케이트장을 만들기 전 학교를 이끌던 교장은 권수원 선생님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의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을 거론하신 분이었는데 조회를 설 때마다 훈화말씀을 길게 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짧으면 한 시간이요, 웬만하면 두 시간이고 아주 가끔이지만 때로는 오전 수업 네 시간을 모두 할애하기도 하였다. 뙤약볕에 서서 '말씀'을 듣던 학생들이 하나 둘 쓰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과 교육관에 대해 열변을 토한 분이었다. 공부가 싫은 학생들이나 오전 수업 시간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은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더 길어지기를 빌기도 했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는 길 가랴말고 없는 길 찾아가서 흔적 많이 많이 또 많이 남기리라.'라는 표어를 큼직하게 붙여놓고 그 자신이 하루 종일 교정을 돌며 화단이며 운동장 등을 손수 챙기던 분이었다. 
손수레에다 물탱크를 만들어 붙이고는 밸브를 여러 개 달아 물을 졸졸 흘리게 한 살수차도 두 대 만들었다. 물론 살수차 당번은 학생이었는데 그 당번이 되면 하루 종일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구석구석에 물을 뿌리게 하였다. 덕분에 학교는 흙먼지 없는 상태가 되었고 공부가 하기 싫은 학생은 남의 당번까지도 대역하곤 하였다.

당시 다른 학교 학생들의 부러움을 모두 받던 북중학교는 이제 남녀 공학으로 변하였다. 교정은 지금도 깨끗하고 교통도 예전처럼 편리한 곳이다. 
그 옛날 복장 단속하고 지각생 벌주던 교문이 사라지고 담장도 없애 '열린 학교'가 되었다. 스케이트 대회 때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진 '생쥐'들도 이제는 머리가 벗겨지거나 '무서리'맞은 중· 장년이 되었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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