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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이 주는 행복
염상균의 수원이야기-8
2009-09-23 09:58:16최종 업데이트 : 2009-09-23 09:58:1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광교산이 주는 행복_1
광교저수지/사진-이용창

광교산에 오른다. 날을 정해놓고 오르지는 않지만 서너 시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나 몸이 무겁고 감기 기운이 느껴질 때도 광교산에 오른다. 초등학교 때 소풍으로 올랐고, 중, 고등학교 때는'리기다'소나무 심으러 가거나 송충이를 잡기위해 올랐다. 광교산 자락에 사는 벗들이 시디신 '싱아'를 꺾어와 '신맛'을 알게도 되었고 도토리묵의'탄력'을 제대로 느끼기도 하였다. 광교산은 그래서 생활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광교산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송충이 잡던'까까머리'가 '까까머리'를 둔 어른이 되어 다시 광교산을 찾았다. 체력단련 및 여가선용이라는 거창하고도 극히 일반적인 등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이 등산로, 다음엔 저 골짜기 식으로 무수히 오르내렸다. 오밀조밀한 등산로를 거닐며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를 오르내릴 때는 여러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어느 능선 어느 곳에 가면 어떤 소나무가 자라고 어떻게 생긴 바위가 놓였으며, 어느 골짜기 어디쯤 가면 멋있는 폭포가 흐르고 얼마만큼 큰 웅덩이가 있는지, 어떤 새와 어떤 동물들이 어디쯤에서 깃들이고 사는지도 엿보게 되었다. 물론 하산 길에는 시원한 막걸리와 보리밥, 또는 잔치국수를 먹는 맛도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어쩌면 그 음식을 바라고 처음부터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광교산이 주는 행복_2
형제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사진-이용창

광교산과 그 인물들
그런데 왜 광교산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해져서 유래를 찾아보니 원래 이름은 광악산(光岳山) 혹은 광옥산(光獄山)등이었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928년 후백제의 견훤군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이에 (자신의 정벌이 정당하였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말 한림학사 이고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광교 남 탑산(팔달산)에 은거하여 오늘날 팔달산, 권선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종중재산으로 설립한 학교가 수원공고인데 선생의 묘역은 광교저수지 위쪽이다.
조선 초 연산군의 폐정에 반기를 든 중종 임금이 개혁의 파트너로 선정했던 사람이 정암 조광조 선생이고, 정암 선생의 묘와 서원(심곡서원) 또한 광교산 동남쪽 용인시 상현동에 있지 않은가.

또한 세종대왕 때의 대마도 정벌을 성공시킨 이종무 장군의 묘역 역시 광교산 동쪽 고기리 근처이고,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 선생의 묘역과 세종의 이복동생이면서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혜령군의 묘역과 그 아들, 손자의 묘역도 수원시 이의동 광교산 자락이다.

광교산이 주는 행복_3
김준룡장군전승지 비/사진-이용창
 
형제봉과 시루봉 사이의 비로봉에는 정자 하나를 만들어 놓아 등산객들의 쉼터로 주목받는다. 그 비로봉 아래 자연암벽에 '김준룡 장군 전승지' 비가 새겨졌다. 병자호란 때 광교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려 정조 때 새긴 것이다. 그 외에도 광교산과 연관된 인물은 능선과 골짜기마다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한남정맥의 주봉, 화성의 진산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벋어 내려온 산줄기가 백두대간이고, 광교산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한남금북 정맥으로 흘러오다가 안성 칠현산에서 금북정맥을 내려 보내고 한남정맥이 되어 김포의 문수산까지 흘러가는 분수령이다. 한강의 남쪽 분수령을 이룬다고 하여 한남정맥이다. 그 한남정맥의 중간 지점에 가장 크고 높은 산세로 앉은 것이 광교산이니 한남정맥의 주봉이라 하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리라. 그래서 광교산 능선을 거닐면서 지리산을 꿈꾸고 백두산으로의 통일을 염원한다면 사람들이 몽상가라고 말할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몽상가라도 좋고 정신병자라고 불러도 좋겠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놀랍게도 그 한남정맥의 주봉 광교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계획되고 건설되었다. 또한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농사를 지어 수원을 풍요롭게 하였다.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경기대학교, 경기지방경찰청을 경유하여 화성의 창룡문 쪽 동성으로, 연무대와 방화수류정 쪽 동북성으로 흐르니 화성의 절반 역시 광교산이 아닌가?

광교산이 주는 행복_4
광교산 입구 단풍나무/사진-이용창
 
신앙의 산 광교산
광교산은 그 지리적인 위치와 특성만큼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엔 인근에서 가장 크고 높으므로 산신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고, 불교 전래 이후엔 불교문화가 꽃 피우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용인시 신봉동의 서봉사에는 현오국사가 주석하였고, 수원시 상광교동의 창성사는 진각국사의 터전이었으므로 광교산은 고려시대에 두 국사를 배출한 산이기도 하다. 서봉사 터의 현오국사비(玄俉國師碑)는 보물 제 9호로, 수원시 매향동으로 옮겨 세운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보물 제 14호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이런 형편이니 전설같이 들리는'여든 아홉 암자'가 충분히 자리 잡았으리라.

광교산은 또 민간신앙의 기도처로 각광 받았으며 무속인들이 은밀히 기도드리는 곳 또한 여기저기 골짜기마다 산재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 기도처들도 많이 없어졌다.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수원에서 갈 때는 경기대 정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도 좋고, 광교 종점에서 시작해도 좋다. 용인에서라면 신봉동이나 성복동, 상현동 등에서도 다양하게 광교산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상현동 쪽 등산로가 한남정맥의 마루금을 밟는 길이어서 여기저기에 한남정맥을 나타내는 리본이 많이 매달렸다. 광교산 정상에서 백운산 바라산을 거쳐 청계산까지 가는 사람도, 그 중간인 백운저수지까지 가려는 사람도 많다. 어느 곳이든 하산 길에는 요기할 곳이 많으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광교산은 그래서 우리에게 마냥 행복만 주는 산이다.
염상균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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