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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
염상균의 수원이야기-11
2009-10-15 16:06:56최종 업데이트 : 2009-10-15 16:06:5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1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1

팔달산은 수원시의 중심 산인데 높이(해발 144미터)도 넓이도 다른 산에 비해 보잘 것 없다. 그렇지만 1789년 수원의 새 읍치를 옮겨올 때 이 산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에 관아를 지어 행궁으로도 사용했으며, 남쪽엔 향교를 옮겨 세우고 뒷날 화성 성곽으로 감싸기도 한 산이다. 산자락 아래 백성들의 집을 짓게 하고 시장을 열었는가 하면 국영농장(둔전) 등 농토를 개간하여 자족적인 도시 여건을 갖추게 하였다.

팔달산에 오르면서 세월을 느끼다

팔달문 쪽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산을 오르다보면 거친 숨을 내쉬게 된다.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기도 하지만 10여 년 전 '날아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세월이 야속하다는 느낌이다. 또 그 '세월'을 증거하는 유적이 보이니 바로 팔달산 고인돌 군락이요, 고려 말 조선 초의 한림학사인 이고(李皐, 1341~1420) 선생의 전설이다. 


망천(忘川) 이고 선생은 혼란스러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탑산(塔山)-지금의 팔달산-에 은거하였는데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가 조정에 들어오기를 여러 차례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이곳 사방이 팔달한 팔달산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였고 태조는 이고 선생의 고집을 꺾지 못해 사람을 시켜 팔달산의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다. 태조가 그림을 보니 과연 사통팔달한 곳이라 여겨 이후부터 탑산이 팔달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팔달산은 이제 시민들의 공원이다. 화성의 성곽이 에두른 가운데 나무도 제법 울창하고 약수터 또한 많아서 도심의 중심 공원으로 손색이 없으므로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794년 화성을 쌓을 때 팔달산 성곽에 들어간 돌은 대부분 이곳 팔달산에서 조달한다. 그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았는데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구멍들이 그 옛일을 보여준다. 심지어 난파 노래비를 에워싼 큰 바위에도 보인다.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2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2


거친 파도의 시대를 산 홍난파는 누구인가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작곡가 홍난파(洪蘭波, 1898~1941)의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화성시 남양면 활초리이지만 당시에는 수원군이었다. '고향의 봄'과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도 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활동하고 소설 '처녀혼'. '향일초' 등을 발표하여 문학적 재능도 보인 예술인이었다.

그러나 난파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그 거친 풍랑의 시대를 잘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장대비 내리는 들판으로 비유했을 때 뉘라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것인가? 정도의 차이는 생길지언정 옷이 젖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더구나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두각을 드러내면 더욱 일제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물론 독립운동에 매진한 분들과 비교하면 난파의 친일 행적은 지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한 세상을 올곧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재능이 난파선을 탄 것과 같은 암울하고 거친 시대에 묻힌 것 아닐까?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3
난파선을 탄 홍난파와 팔달산 노래비_3


노래비를 세운 내력과 도난 사건

'수원출신 고 홍난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노래비 건립추진 위원회가 11일 하오 4시 수원문화원 '싸롱'에서 김승제 문화원장과 중·고등학교 음악담당교사와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날 이 회의에서 노래비 건립후보지를 방화수류정 근처에다 결정하고 건립기금은 총25만원으로 책정되었는데 모금방법은 학생들과 시민들로부터 모금운동으로 전개하여 기금을 충당할 것' 이라는 기사가 인천일보(현 경인일보) 1968년 7월 12일(금) 자 신문에 나온다. 노래비 세우기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100여 일이 지난 10월 24일(목) 자 경기연합일보(현 경인일보)에는 '고 홍난파 선생을 기념하는 노래비 제막식이 23일 하오 2시 시내팔달공원에서 미망인 이대형여사와 고향의 봄을 작사한 이원식씨 윤석중씨 그리고 유한철씨 등 국내 저명 작사가와 시내 기관 장학생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졌다. 이날 제막된 노래비 건립은 시내어린이와 시민들의 성금 30만원으로 이룩된 것인데 노래비에는 국민들이 애창하고 있는 고향의 봄 가사와 약력이 새겨져 있어 더욱 의의를 깊게 했다' 고 실었다.

그러나 경기신문(역시 현 경인일보) 1974년 6월 11일(화) 자에는 '홍난파 노래비 흉상 도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9일 새벽 수원시 남창동1 팔달산 중턱에 세워진 홍난파노래비에 부착된 홍난파선생의 동제흉상(직경30cm)과 노래비라고 표시한 글자 중 '노'자와 '비'자를 도난당했다.' 이어서 6월 15일에는 노래비를 복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일어나고 이틀 뒤인 6월 17일(월)에는 범인을 검거했다는 기사가 경기신문에 나온다. 

범인은 서둔동의 '새싹교'의 이름판을 훔친 혐의로 검거되어 여죄를 추궁하던 차에 난파노래비의 흉상과 글자들을 뜯어다가 당시 돈 1200원을 받고 고물상에 팔았다고 진술했다. 게다가 수성고등학교의 정문에 붙인 동판도 훔쳐서 역시 같은 금액에 팔았다고 했으니 요즘 심심찮게 일어나는 다리 난간과 맨홀 뚜껑 등을 훔치는 도둑들의 원조 격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7월 23일에는 '고향의 봄' 멜로디 속에 홍난파 노래비 보완식이 열린다. 새싹회장과 도지사, 시장과 시민들이 참석하였다고 하니 홍난파 그 인생만큼이나 노래비도 수난을 당한 것이다.

활초리의 생가와 말년을 보낸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옛집 주변은 공원이 되었다.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그의 곡조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었고 홍파동 집은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도 하였다. 숨을 몰아쉬며 올라간 팔달산엔 난파노래비가 오늘도 말없이 수원시가지를 바라본다.
염상균 /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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