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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정문'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염상균의 수원이야기-12
2009-10-22 11:52:46최종 업데이트 : 2009-10-22 11:52:4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화성 정문'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_1
'화성 정문'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_1

장안문 이름에 담긴 의미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면서 임금의 행차를 처음 맞이하는 곳이니 정문에 해당된다. 문루 이름인 '장안'은 옛날 중국의 도성(都城)을 말하는데,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쪽 고을을 가리킨다. 주(周), 진(秦), 전한(前漢), 수(隨), 당(唐)나라들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장안'이라고 하면 '수도(首都)'의 대명사로, 혹은 '서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화성의 정문에 왜 그런 격조 높은 이름을 내걸었을까?

정조는 중국의 장안에 도읍하였던 여러 왕조 가운데 특히 한(전한)나라의 통치에 주목하였던 듯하다. 진시황제의 후손들이 통치하던 진나라를 멸하고 들어선 한나라는, 한 고조 유방 이후로 5대, 6대, 7대인 문제, 경제, 무제 때 절정기를 누렸다. 정조는 한나라 왕조의 전성기를 이 땅에 실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은 '풍패(豊沛)'이다. 여기에서 군사를 일으켜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천자로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이곳에 들러 주민을 위로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거나 부역을 늦추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풍패'라 함은 임금의 고향을 일컬으면서 은혜를 받은 선택된 땅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게다가 천하를 통일한 후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풍패'를 수도에 그대로 옮겨 건설하고 고향 사람들도 이주시켰다. 이를 일컬어 '신풍(新豊)'이라 하였다.

을묘년(1795) 2월 22일에 정조는,
"화성 성문에 이제 곧 편액을 달 것인데 성의 북문은 '장안'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며, 진남문(鎭南門)을 고쳐 신풍루로 한 것은 대개 한나라 제실이 풍패에서 일어났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호조참판 조윤형에게 명하여 신풍루. 장안문의 편액을 써 올리게 하라."
고 하였다.
신풍루는 행궁의 정문이니, 성의 정문과 그 핵심인 행궁의 정문에 한나라의 이상 사회를 표방하면서 한 고조처럼 아버지의 고향을 새로 건설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 묘소를 옛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새수원으로 이주시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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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공사 전 모습

석축의 가운데로 통로를 내면서 무지개 모양 문 2 틀을 만들었는데 장안문의 경우 성 안쪽 홍예(虹蜺)의 높이는 19척, 바깥쪽은 17척 5촌으로 하였고, 팔달문은 이보다 작은 안쪽 홍예 높이 18척, 바깥쪽은 16척으로 하였다. 음의 방향인 장안문의 수치는 양을 나타내는 홀수로 양의 방향인 팔달문은 음을 나타내는 짝수로 했는데, 음양의 조화를 맞추려는 다분히 의도된 수치일 것이다. 이런 조화에도 불구하고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당해 훼손되었다. 1975년부터 시작된 화성 보수공사에 의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반원형의 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면서 성루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 옹성이 함락되면 성문과 성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적대(敵臺)인데 성문 좌우에 석축을 돌출 시키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적대를 갖출 생각이 앞섰기에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은 전례 없이 문을 가운데로 내었다. 
이는 적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는 효과도 노리고, 반대로 겁을 먹게 하는 효과도 거둔다. 단순한 사람은 옹성의 문과 성문이 곧장 났으니 성급하게 쳐들어갈 생각을 할 것이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얼마나 강력한 군대이기에 두 문을 가운데로 곧장 내었나 하고 움츠리게 된다. 
이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일이다. 적들이 우왕좌왕하거나 망설일 때, 혹은 짓쳐들어올 때 정예화 된 군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의 공격력을 뽐내게 된다. 문루의 1층과 2층에서 총을 쏘고 옹성에 둘러서서 공격하는가 하면, 좌우의 적대에서 총포를 내뿜는 것이다. 
그래서 팔달문과 장안문의 옹성 위나 적대 위의 여장(살받이-화살받이)들은 다른 곳과는 달리 '凸' 형 구조로 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것과 정예화 된 군사만이 주둔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겠다.

장안문의 계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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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외도-화성성역의궤

좌우의 적대는 옹성보다 돌출되지 않으면서 옹성을 완벽히 보호하는 구조를 지녔다. 너무 돌출 되어도 고립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적당한 자리를 잡아 시설한 것이다. 그러나 돌출 되다보니 적대 바로 밑으로 기어 들어온 적을 살피기는 어렵다. 그래서 만든 시설이 현안(懸眼)이다. 현안으로 해서 적대 바로 밑이 내려다보이고 공격도 하게 되니 적대 스스로의 방어력을 갖춘 셈이다. 이 현안들은 옹성의 바깥쪽에서 설치하였고 치성에도 설치하였다.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 적대의 크기는 모두 똑같은데(둘레 22보1척), 현안의 숫자는 장안문의 좌우적대가 각각 3개씩, 팔달문은 2개씩 만들었다. 하얀 화강석에 현안을 깊이 내려 팠으므로 낮이면 그림자로 인해 검은 세로줄이 3개 혹은 2개씩 나타나게 된다. 
이는 시각적으로 적대를 더욱 단단해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강렬한 인상을 적들에게 심어준다면 성의 방어력은 한결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민간신앙의 흔적-장안문 안의 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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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안쪽에 있는 성혈의 모습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영험함이 깃들어서인지 전통 신앙의 발자취를 느끼게 되는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옹성의 반대쪽, 그러니까 성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서는 성혈(性穴)이 보인다.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어머니들이 정성들여 빌어대던 흔적들이 너무나도 선명히 남은 것이다. 
작은 돌(자석子石)을 지니고 와서 기단석에 돌려가며 비나리를 하던 모습도 눈에 잡힐 듯하다. 이 성혈들을 보노라면 삼신할머니에게 빌어대던 절박한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성이 성으로서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이렇듯 민중들의 소박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도 자리 잡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염상균 /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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