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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창성사 터와 진각국사
염상균의 수원이야기-14
2009-11-07 14:53:01최종 업데이트 : 2009-11-07 14:53:0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불교유적의 보고-발굴이 시급하다

광교산 창성사 터와 진각국사_1
광교산 창성사 터-누군가 농사를 짓는다


불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1700여 년이 된다. 명산 경기의 광교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든 아홉 암자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그 가운데 수원시의 광교산 구역에 창성사 터가 보인다. 광교산 버스종점 못미처 다리를 건너기 전 식당을 가로질러 오른쪽 계곡으로 이십여 분 걸어가면 나온다. 

지금도 오래된 축대가 길게 남았고 주춧돌이며, 석탑의 일부와 석물과 기와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누군가 밭으로 경작하면서 일부 석물들을 임의로 옮겨 그 훼손 정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는 약수터가 두 곳이나 있고, 절터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시원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더구나 이곳은 영주 부석사에서 지금의 무량수전을 중건한 주인공인 진각국사가 주석하던 곳이었다. 
그 비석은 지금 화성의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옮겨져 보존한다. 진각국사는 고려 공민왕 때 '화엄부석국사'라는 칭호를 받았고 말년을 이곳 창성사에서 보내다가 입적하였다. 신라 때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의 법맥을 계승했다는 뜻이다.

광교산은 두 명의 국사를 배출한 불교의 성지이다. 
용인시 신봉동 서봉사에 주석하던 현오국사(1127~1179)와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창성사에서 주석한 진각국사(1307~1382)가 그들인데 두 국사 모두 13세에 출가하였고 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전수하였다. 두 국사의 비석이 지금도 남아서 현오국사비는 보물 제 9호로, 또 진각국사비는 보물 제 14호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현오국사비는 제자리에서 비각 속에 들었고, 진각국사비는 수원시 매향동 방화수류정 동쪽 언덕으로 옮겨 보호한다. 그러나 두 절터는 지금 잡목이 우거지거나 농지로 사용되는 형편이다

광교산 창성사 터와 진각국사_2
창성사 진각국사비


두 절터의 흔적은 방치되어 날이 갈수록 훼손될뿐더러 축대 등의 붕괴 위험도 심각한 형편이다. 한때 고려 불교를 휘어잡았던 역사의 현장이자 고승의 자취가 서린 곳이 관계자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을 할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로 지정을 했을 터인데 지정된 보물인 비석만 보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비석도 중요하지만 그 비석의 주인공을 조명하고 그 절터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논리인가? 두 절터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석물들과 축대도 또한 문화유산 아닌가? 

아름다운 석물 발견

최근 창성사 터에 갔다가 아주 아름다운 연꽃무늬가 베풀어진 한 석물을 발견하였다. 절터 인근 계곡에서 낙엽 속에 파묻힌 채 발견되었다. 아마도 한 고승의 부도 가운데 일부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꽃을 선각(線刻)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유물로 보이는데 고려 말이라면 혹시 진각국사의 부도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광교산 창성사 터와 진각국사_3
창성사 터 인근 석물


꽤나 크고 무거워서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으므로 연꽃무늬를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이미 드러난 무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 크기로 보아 예사 인물의 부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창성사 터를 발굴하게 되면 그 석물의 용도와 주인공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절터 언덕 위에 세웠던 부도가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이유로 도괴되어 굴러 내린 듯하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손을 탈까 두려워 낙엽으로 두껍게 덮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창성사의 조망은 영주 부석사의 조망에 비하면 약하지만 두 절 모두 구릉에 자리를 잡은 것이 공통점이다. 또한 축대도 역시 비슷하여 진각국사의 안목을 느끼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진각국사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건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늘 뇌리에 박혔을 진각국사였다. 부석사의 축대 또한 문화유산으로서 중요시되는 현실이다. 창성사의 불전도 아마 부석사 무량수전에 버금가는 명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교산 창성사 터와 진각국사_4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는 이제까지 법등이 이어져 오면서 축대 또한 관리를 하였겠지만 창성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어 축대도 훼손 정도가 심하다. 또 누군가 농사를 지으면서 제 편리한대로 석물들을 이리저리 옮겼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발굴을 서둘러야 하고 고려 때 창성사의 모습을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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