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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화성에 가자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15
2009-11-16 17:00:18최종 업데이트 : 2009-11-16 17:00:1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화성에 가자 _1
배다리-8폭 병풍 중 주교도 모습

배다리의 생김새를 보니
정조 13년(1789) 양주 배봉산에 썼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때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의해 뚝섬에 배다리를 놓았다. 정조 19년(1795) 을묘원행 때도 요긴하게 이용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화성에서 열기 위해 왕을 비롯한 수천 명의 인원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때 완벽한 배다리가 가설된 것이다. 36척의 배를 붙여놓고 배 위에 송판을 깔아 왕복 도강(渡江)을 무리 없이 수행한 것이다. 

배다리는 강의 가운데 부분에 가장 큰 배를 배치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작은 배를 배열하여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무지개 모양을 이루었다. 
배 한 척은 강의 상류를 향하여 머리를 두고 한 척은 하류를 향하도록 하여 서로 교차 시켜 가면서 늘여 세웠다. 이렇게 해야 닻을 내릴 때 닻끼리 서로 엉키지 않고, 배들이 정연해지기 때문이다. 

배 위에는 배의 폭보다 더 큰 나무(종량縱樑) 다섯 개를 여섯 척 간격으로 놓아(전체 넓이 24척) 배에 묶고, 두 나무가 만나는 곳에는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비녀장을 꽂아 고정 시킨다. 이 종량 위에 가로지르는 판자(횡판橫板)‐길이 24척, 넓이 1척, 두께 2치‐를 잇대어 깔고 판자의 양쪽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잔디를 깔았다. 배다리의 양끝 강안(江岸)에 각각 하나씩의 홍살문을 세웠고, 배다리의 한복판에도 또 하나의 홍살문을 세워 세 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이는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어서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대개의 홍살문이 궁전이나 왕릉, 서원, 관아 등에 세워지는데, 배다리에 그것도 세 개나 세운 이유는 안전을 지극히 도모해야 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을묘원행 배다리의 특징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화성에 가자 _2
배다리-원행을묘정리의궤

첫째, 장소 선택의 적절성이다. 배다리를 놓을만한 지형은 동호(東湖), 빙호(氷湖), 노량(露梁) 등인데, 지금의 동호대교 부근, 서빙고, 동빙고동, 노량진이 그 곳들이다. 동호나 빙호에 비해 노량은 강폭이 좁으면서 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고 수심도 제법 깊어 두 군데 후보지를 제치고 선정된다. 
훗날 그 곳에는 한강 최초의 근대식 다리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놓이게 되니 이미 정조대 적확한 장소를 선정했음을 알게 된다. 

둘째, 배다리에 민간 선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서울 부근 포구의 경강선(京江船) 선주들에게 세곡 운반이나 소금 운반 등의 원하는 혜택을 주기로 하고 배를 참여 시켰다.
"오강(五江-한강, 용산, 마포, 서강, 현호)의 뱃사람들은 배다리에 편성되는 것을 좋은 직분으로 받들게 되어,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자는 오직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이미 얻은 자는 혹시라도 잃을까 걱정하면서 남에게 뒤질세라 성력을 다해 일에 참가할 것이다. 은혜를 베풀면서도 낭비하지 않고, 수고롭게 하면서도 원망을 사지 않고, 위엄을 보여도 사나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동원된 민간 선박에 못을 박는다든지 하여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도 튼튼한 다리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돋보인 배다리의 경영과 관리

셋째, 과학적인 경영과 관리로 인해 비용을 많이 절감하였다. 
배다리는 한복판이 높고 양면은 차차 낮아져야만 보기에도 좋고 실용에도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배다리에 참여하는 배의 높이와 넓이를 미리 재어 아무개의 배는 아무개 배 아래라는 것을 일일이 적어 놓는다. 그러면 배다리를 놓을 때 효과적이다. 그리고 왕명으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배다리를 전담하는 상설 기구로 하여 그 운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주교지남(舟橋指南)',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 등을 제정하여, 배다리의 운용에 대한 방안 및 주교사의 운영을 정례화 하였다. 

또한 배다리 가장자리에는 잔디를 깔았는데 이를 주교사에서 모두 준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각 배마다 자신의 배에 깔 만큼의 잔디를 미리 떼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배다리를 해체할 때 한 배에 깔았던 판자들을 한 무더기로 모아서 기록하고 창고에 보관한다. 다시 배다리를 설치할 때 시간과 공력을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과학적이고도 치밀한 경영과 관리는 곧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넷째, 단순히 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로서의 기능에다 미적인 감각을 추가하였다. 배다리 양 옆에 난간을 설치하고 잔디를 깔았는가 하면 송판 위에 황토를 뿌려서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맨 땅을 걷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홍살문을 설치하여 숙연한 가운데 다리를 건너도록 한 것도 일종의 심리적인 미적 감각이라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양쪽의 강안(江岸)에 배다리를 고정시킬 때는 굵은 쇠사슬로 엮어서 튼튼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다섯째, 농축된 문화적 능력은 배다리의 설치 시간을 대폭 줄였다. 을묘년(1795) 2월 13일에 설치하기 시작한 배다리는 11일 만인 2월 24일에 완성하였다. 당시 주교사에서도 20일 정도 기간을 잡았었는데 절반가량 기간을 앞당긴 것이다. 배다리 건너는 연습을 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화성에 가자 _3
용양봉저정 상세도-8폭 병풍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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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화성에 가자 _4
구경하는 백성들 모습 상세도-8폭 병풍 중
 
을묘원행 여덟 폭 병풍에는 지금 노량진 언덕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그림이 상세하게 나온다. 게다가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도 자세히 나온다. 남녀노소가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러 강변 언덕에 나온 것이다. 엿이나 떡을 파는 장사꾼도 보이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정조 임금의 연출력이 돋보인 그림인 것이다. 상하가 함께 어울려 즐긴 모습을 보며 우리시대 국민들의 행복한 나날을 기대해 본다.
염상균 /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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