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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중.고 100년사에 담긴 애환-일제강점기엔 여학생 시절도
염상균의 수원이야기 16
2009-11-23 15:42:56최종 업데이트 : 2009-11-23 15:42:5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중.고 100년사에 담긴 애환-일제강점기엔 여학생 시절도_1
1942년 준공한 본관 건물-동문회 제공

수원중.고등학교는 그 역사가 올해로 100년이 된다. 
그 시작은 1909년, 경술국치 1년 전이다. 이미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어가는 시기였다. 당시 독립운동가와 수원 유지들이었던 양승관, 홍건섭, 신준희 선생이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한다'며 상공회의소 부속사업으로 수원상업강습소를 창립한 것이다. 
1916년에는 화성학원으로, 또 수원상업전수학교로 승격인가를 받았고, 일제 말기인 1944년 수원여자상업학교로, 또 광복 후에는 수원중학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1951년부터는 지금처럼 수원중학교와 수원고등학교로 이름을 이어온다. 격동의 한 세기를 거치면서 그 애환이 얼마나 많았으랴!

1944년이면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떨치며 우리 국민들을 더욱 옥죄는 시기이다. 이때 그들은 항일의 요람인 수원에 여자상업학교를 개설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말이 좋아 여자상업학교이지 실제로는 전쟁에 유용하게 쓰기 위한 여자 기간병의 양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뒷전이고 부상병 간호나 비행장 관리 등 자신들의 목적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에만 열성이었다. 그래도 일본인 교사에 비해 우리나라 교사들은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부역에 시달린 여학생들
수원중.고 100년사에 담긴 애환-일제강점기엔 여학생 시절도_2
수원여상 학생들의 모습-동문회 제공

 "내가 수원여상에 다닐 때는 일제강점기 끝 무렵이어서 일본 사람들의 극성이 대단할 때였다. 그러니 우리는 공부고 뭐고 부역에만 시달린 기억만 생생하다. 지금의 수원비행장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위해서 우리는 일주일에 사나흘을 부역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비행장에 가면 군인들의 부식을 위한 채소밭이 꽤나 넓었다. 우리는 그 밭에 가서 풀도 뽑고 채소밭도 가꾸는 일을 강제로 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키 큰 다섯 명을 뽑았는데 나도 거기에 들었다. 키 큰 아이들은 군 취사반으로 가서 나물을 다듬거나 채소를 씻는 등 허드렛일을 도왔다. 취사반의 우리들은 밭에 나가서 얼굴을 검게 그을리는 것에서 벗어나 마냥 좋다고만 했던 철부지였다."

당시 수원여상을 다니던 남궁요숙(81)씨의 증언이다. 그는 지금 알파포스터칼라 등 그림물감 제조업체로 유명한 알파색채(주)의 사장인데 1945년 입학하여 광복 때까지 약 6개월 동안 수원여상을 다니던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또한 우리는 수원역 뒤편의 농사시험장에 가서 모내기를 한 기억도 난다. 한 줄로 쭉 늘어서서 가르쳐 준대로 모를 서너 개씩 뽑아들고 논에 꼽았다. 거머리에 종아리를 물려서 검붉은 피가 철철 흐르던 장면도 생생하다.
당시의 학교선생님으로는 영어를 가르쳤던 함진한 선생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우리가 왜 일본말을 써야 하느냐면서 사석에서는 꼭 우리말을 사용하고 공석에서는 영어를 쓰신 분이었다. 당시 그렇게 올곧게 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준 선생님으로 인기가 높았다." 

남궁요숙씨는 그 6개월의 학창시절 추억과 모교에 대한 애정으로 올해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하였다. 남궁요숙씨보다 1년 선배인 최경섭(81)씨도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광복이 가져다준 선물은 여학생 이별
"그때만 해도 여학교가 변변치 않았기에 우리 수원여상에는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농업 시험장에 가서 보리밭 밟기, 모심기, 비행장에 가서 비행기를 가리기 위해 짚으로 틀어 어렸고 4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차도 없이 걸어갔는데 운동화는 배급제라 아껴 신어야 했기에 게다를 신고 걸어 다녔다. 1945년에도 신입생 두 반을 또 뽑았으므로 전교생은 1학년과 2학년을 합해 약 260여명으로 두 반씩 네 반이 되었다. B29전투기가 하늘을 수놓는 공습 때는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 숨을 죽이고 숨었던 때가 엊그제인 것 같다. 1945년 여름 방학 때 8.15광복을 맞이했는데 이때 이북으로 돌아간 학생은 38선이란 장벽에 막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광복 후 학교에서는 여학생을 모두 매향여중과 수원여중으로 보내고 다시 전처럼 남자학교로 전환하였다. 당시 여학생들은 서로 헤어지는 것과 학교가 폐지되는 것에 반발하여 끝까지 데모하면서 선생님들과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2층 교실에서 아래층의 교무실에 들리도록 책상을 꽝꽝 흔들며 저항을 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여운' 데모가 아닌가? 그래서 수원여자상업학교의 역사는 1년 반으로 끝나게 된다. 1946년에는 6년제 수원중학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새로운 100년을 위한 도약
수원중.고 100년사에 담긴 애환-일제강점기엔 여학생 시절도_3
1959년 학교의 정문 모습-동문회 제공

극심한 혼란기의 격동을 겪으며 잘 다져져서 그랬을까? 수원중.고등학교의 100년 역사는 더욱 단단해졌다. 
동문들 서로 끈끈하게 뭉치며 장학 사업이며 100주년 기념사업도 착착 진행해 나간다. 100년 동안의 역사이다 보니 정계나 재계, 학계와 체육계에도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라며 총동문회 김영진 사무총장은 어깨를 우쭐해 보인다. 

교육부 지침에 의하여 2008년부터 수원중학교에 여학생을 뽑기 시작했으니 실로 64년 만에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교정에 메아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100년을 멋지게 이어나가 수원의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자리 잡기를 기원한다.
염상균 /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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