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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초등학교의 소풍과 운동회 날
[염상균의 수원이야기-1]
2009-07-23 17:28:13최종 업데이트 : 2009-07-23 17:28:1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신풍초등학교의 소풍과 운동회 날_1
신풍초등학교-사진 이용창

수원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겐 아주 익숙한 얘기다. 신풍초등학교에서 소풍을 가려고만 하면 비가 내린다던가, 운동회 날에도 꼭 비가 내린다는 둥. 
심지어 신풍하고만 연결이 되면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린다고 하고. 다른 학교에서는 일부러 신풍과 같은 날을 고르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물론 때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기야 기상청에서 야유회를 가기 위해 날만 잡으면 날이 궂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어느 학교 어느 집단인들 야외 행사에 비 내리는 것을 환영할까? 또 누군들 비 내리고 날 궂은 때 야외 활동을 하려고 할까?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무슨 저주가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한다.

'신풍괴담'은 어찌 보면 '학교괴담'의 원조라고 하겠는데 이런 예는 다른 지방에도 한 학교씩은 대개 있으므로 크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신풍학교에서는 고목을 베자 이무기가 나왔고, 그 이무기를 죽였더니 그 이후로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닌가?

신풍(新豊)은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바로 옆의 화성행궁 정문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화성행궁의 정문은 본래 진남루(鎭南樓)였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명령에 의해 신풍루로 바뀐다. 중국 한나라 고조의 예에서 비롯되었는데,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고조 유방이다. 그의 아버지는 태공인데 한고조 유방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진나라의 핍박에서 벗어나 새 나라를 세운 것에 모두 즐거워했을 때 태공만이 떨떠름해 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고 좋은 음식과 의복, 심지어 어여쁜 여인까지 보내도 태공의 우울증은 가시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태공은 고향에 돌아가고픈 향수병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새롭게 황제가 된 유방이 아버지를 고향에 보내겠는가? 누가 태공을 인질로 잡고 거사를 벌인다면 유방의 한나라 또한 위험에 빠지는 일 아닌가? 유방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가장 합리적인 일로 아버지의 향수를 달랜다. 바로 고향인 풍읍의 주민들을 도읍지에 이주시키는 일이었다. 
고향과 똑같은 마을을 만들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달콤한 유혹을 한다. 세금을 십년간 면제하고 군역에서 제외시키며 죄인들도 모두 사면과 복권을 해 준다. 본래의 고향이 풍읍(풍패)이었고 새로 만든 고향은 신풍이라고 한 것이다.

신풍초등학교의 소풍과 운동회 날_2
신풍루

정조 임금도 마찬가지 논리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주변의 수원부를 지금의 팔달산 근처로 옮긴 것이다. 역시 유방의 예처럼 세금과 군역, 죄인들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베풀었다. 화성행궁은 관아 겸 임시 궁궐이었다. 
신풍학교 자리는 우화관(于華館)이라는 화성유수부의 객사 터이다. 1789년 처음 세울 때는 팔달관이었다가 1795년 우화관으로 바꾸었다. 
이 객사를 활용하여 1896년 수원군공립소학교를 세웠고 1941년 신풍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학교의 역사가 113년이나 되었고 3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도 이 학교 출신이며, SK그룹의 창업주인 고 최종건회장도 동문이다. 화성행궁 가운데 우화관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자면 신풍초등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동문들과 재학생들의 반발이 심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솔로몬의 지혜를 빌어야 할까?

"국보로 지정된 화령전(華寧殿) 전각 바로 뒤 경내에 심어져 수백 년을 두고 자란 잣나무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공유물인데도 불구하고, 소유자도 아닌 신풍국민학교에서 고목(枯木)이라는 이유로 시교육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매향제재소에다 5만환을 받고 판 사실이 있어 공문서 한 장으로 쉽사리 처리해버린 교육위원회 처사에 대하야 일반의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5만환에 팔려간 이 잣나무는 둘레가 약 두 아름이 넘는 큰 노목으로서 화령전을 찾아드는 탐승객들의 여름 한 철 좋은 휴식처로 총애를 받은 터이며 작년에도 이 나무에 잣 열매가 열려 고사(枯死)된 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국보로 지정된 고적 경내에 심어진 이 노목을 시교육위원회 자체가 단독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성도 없는 일개 국민학교에다 내주어 부당한 이득을 취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며, 만약 고목으로서 쓸모가 없다면 고적보존위원회로 하여금 처분케 하여 허물어져가는 고적 수리비에 충당되어야 할 것이다."

1961년 3월 24일자 인천신문(현 경인일보의 전신)에 '고적지 나무 베어 팔아'라는 큰 제목으로 또 '수원교위와 신풍교 처사에 비난'이라는 작은 제목으로 실린 기사 전문이다. 당시 잘 나가는 방송국 아나운서의 월급이 5만환이었다고 하니 적은 돈은 아닌 듯한데 그래도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화령전이 사적 115호로 지정된 것은 1963년 1월 21일이었으므로 그 이전에는 국보로 불렀던 것 같다. 화령전은 우화관(신풍초등학교) 뒤에 1801년 순조가 아버지 정조 임금의 사당으로 지은 전각이다. 이곳에는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시기도 하였다. 그 신성한 사당 뒤 고목을 베어 팔았으니 비난이 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혹시 그 이무기 전설의 나무가 화령전 뒤뜰의 잣나무며 그 일 때문에 '신풍괴담'이 생긴 것은 아닐까?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답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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