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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중)
2008-01-03 16:11:07최종 업데이트 : 2008-01-03 16:11:0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이사장 김이환)의는 매년 신년 하례식에 이어 팔달산 성신사 (城神祠)터에서 전 회원의 마음을 모아 성신(城神)에게 제를 올리는 예를 갖추고 있다.  

필자도 그 모임의 말미에 이름을 걸어두고 있는 터여서, 화성을 깊이 사랑 하고 연구하는 회원들과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 임시로 마련된 제상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곤 한다. 
분에 넘치게도 얕은 글재주나마 필자가 제문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곳에서 다시 술과 향이 올려졌으며 다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모았는가? 
작은 자리였지만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후일 이 지면에 다시 성신사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지만 우선 간략하게 성신사에 대한 소개를 한다.  
화성이 완공된 1796년 정조대왕은 어명을 내려 성을 지켜주는 신(城神)을 위한 사당을 지으라고 명한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 11일에 공사를 시작하 고 그 해 9월 1일에 성신사가 준공됐다.  

성신사가 완공됐다는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화성 낙성연 전에 위패를 모시도록 지시하고 제문을 스스로 지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9월 18일에는 헌관을 화성유수가 담당하도록 명을 내렸으며, 9월19일에는 사당 안에 신주(神主)를 봉안할 때 향축(香祝: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내 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향축과 제수용품을 규정에 의해 내려보내도록 했다.  

성신사는 화성을 영원히 보존하고, 우리 국토와 수원땅과 백성들을 무사태평하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는 사당이자 기념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신사는 1796년 화성이 낙성되고 나서 낙성연이 열리기 전에 먼저 제사를 올린 사당이다.  
그런데 1800년 개혁정치를 진두 지휘하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노론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다.  
이어 정조대왕이 아끼던 신하들이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정조의 꿈이 담긴 화성은 관심 밖으로 멀어지게 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성신사도 마찬가지. 
성신사에 대한 그 뒤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확 실치 않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돌보는 사람 없이 비바람에 서서히 폐허가 됐을 것이고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긴 화성과 함께 노론들의 '의도된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런 역사를 생각하면서, 뛰어난 임금이었던 정조대왕을 기리면서, 우리는 성신사라고 추정되는 자리에서 정성껏 향축을 올렸다.  
정조대왕은 근엄하면서도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임금이었다고 한다.  

지난호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화성연구가이자 문화유적 답사전문가인 염 상균씨(화성연구회 회원)는 강좌를 통해 정조대왕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 바 있다.  

'해가 비치는 곳이면 항상 자세를 바로 잡았고, 옷을 갈아입거나 소변을 볼 때도 북극성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쪽을 향하지 않았으며, 비바람이 불거나 천둥이 일면 반드시 일어나 표정을 고쳤다.  
종묘에 제사하고 문밖을 나설 때는 근엄하고 경건한 태도였고 술잔을 올릴 때면 민첩하기가 날아갈 듯 하여 일을 돕는 백관들도 모두 엄숙히 대했다. 
제사 때도 음식을 올려 오면 반드시 꿇어앉아 맛을 보았다'  

이런 정조대왕이었기에 국가적 대역사로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해 줄 기지로서의 화성을 축성한 뒤, 성신사를 지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효심을 바탕으로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애민군주, 합리적인 국정, 단호한 의지와 확고한 이념으로 지(知), 인(仁), 용(勇)을 겸비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조대왕.  
그는 성신사를 지은 데서도 나타나듯 하늘을 공경하는 임금이었다. 따라서 승하 후 능의 이름을 건릉(健陵)이라고 했다.  
이는 쉬지 않고 가고 있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또 '바른 임금'이라는 뜻인 정종(正宗)이라는 묘호(廟號:임금의 공덕을 기리어 사후에 주던 이름)를 받았다.  

이는 정조대왕이 도학(道學)과 의리(義理), 법도가 바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와 교훈을 바탕으로 마음을 바르게 했기 때문에 조정, 백관, 만민이 바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조대왕을 '바른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조대왕은 하늘만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두려워 할 줄 알았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물과 같은'백성들의 힘 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격해지면 배를 뒤집기도 하는 존재다. 그
렇기 때문에 백성들과 관계된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리 깊은 밤일지 라도 곧바로 아뢰게 했다. 
1800년 6월 병이 깊어져 국사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백성들과 관련된 일이면 즉시 내게 알려라"고 명했는데, 그 달 28일 승하하고 말았다.  

화성 성역이 모두 끝난 1년 후인 1797년의 수원 행차 때에는 "성이 모두 완공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 집집마다 부자가 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는 것)여덟 글자이다."라 고 하면서 신도시 수원 땅에 사는 백성들의 민생을 걱정하기도 했다. 

'호호부실 인인화락!'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국가와 모든 지방자치단체의 지도자, 기업인들이 머리와 가슴에 새겨 넣고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경영이념이다. <김우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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