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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하)
2008-01-03 16:27:18최종 업데이트 : 2008-01-03 16:27:1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정조대왕은 효심이 지극했다. 
또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듯이 백성을 보살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효성에 대해서는 가히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라 할 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조대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존)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것도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현장을...  
어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할아버지 영조에게 달려가 아버지의 구명을 호소한다.  
하지만 손자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친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할 수 없이 스스로 목을 매거나 돌에 머리를 부딪치는 등 자결을 시도했지만 사람의 목숨이 어디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것인가? 
사도세자가 죽지 못하자 영조는 음력 5월 불볕 아래 놓인 뒤주 속으로 들어가라고 호령을 했다. 그리고는 뒤주에 가둔 뒤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못질을 해버렸다. 
목이 말라 탈진 상태인 사도세자에게 일부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청심원 등을 넣어주기도 했지만, 영조는 사도세자가 잘 죽지 않는다고 풀을 베어다 뒤주 위에 덮어버리라고 명했다.  

찌는 듯이 더운 날씨, 사도세자는 결국 좁은 뒤주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어린 정조의 뇌리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 지워질리 없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은 창경궁 앞(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에 세워 지는데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던 기간인 5월13일부터 21일까지는 매년 아예 이곳에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죽어가던 아버지의 고통을 헤아리기 위한 애틋한 마음이었으리라.  

정조대왕은 재위 초부터 부친의 묘 자리가 별로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오고 있었으나 실행을 해오지 못하고 있다가 즉위한 지 13년이 지난 1789년에야 수원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이장을 하고자 땅을 팠을 때 사도세자의 관속에는 물이 차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정조대왕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28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런 곳에 모셔 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풀릴까?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園寢:왕세자나 왕세자빈 ,왕의 친어버이나 임금을 낳은 어머니인 빈의 묘소-사도세자는 후에 장조로 추존됨으로써 현륭원이었던 원침의 이름도 임금과 같은 격인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주변에 갖출 것을 다 갖추어서 그것으로라도 작은 정성을 표시해 야겠다."  

원래 정조대왕은 검소한 분이었지만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 만큼은 화려하게 조성했다. 얼마 전 이 기획물 가운데 '왜 화성을 쌓았을까'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언급한바 있다.  

정조대왕은 능행차 때 아버지의 묘에 엎드려 눈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서럽게 흐느껴 울었으며, 결국은 탈진해 늙은 정승 채제공의 등에 업혀 내려 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의 효성은 비단 아버지 사도세자에게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한중록'의 저자이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정조대왕은 스스로 "나라의 큰일이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어머니께 여쭙지 않고 그냥 한 일은 없다."고 술회 할 정도로 혜경궁 홍씨를 받들어 모셨다.  
혜경궁 홍씨가 병이 났을 때는 밤낮 없이 근심하며 스스로 약을 지어 드렸다.  
1795년에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를 위해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성대한 잔치를 열어드렸다. 화성에서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할 때는 어머니가 놀라실까봐 대포의 방향을 행궁에서 멀리하도록 했다. 

효심 부분에 대한 화성연구가 염상균씨의 글을 인용해보자.  
"회갑 잔치를 위해 서울에서 오는 도중에도 음식을 일일이 맛본 후 드 렸으며, 쉴 때마다 다가가 안부를 여쭈었다. 어떤 날 비가 내렸는데, 높은 고개나 미끄러운 길이 나타나면 자신의 옷이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번번이 말에서 내려 혜경궁 가마 옆으로 가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효심이 지극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영조와 할머니 정순왕후에게도 큰 효성을 보였다. 영조가 나이가 들어 병이 생기자 소변을 맛보는 등, 10여년간 밤낮 없이 할아버지 곁을 떠 나지 않으면서 병간호를 했다. 증세가 조금이라도 심해지면 울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효와 개혁의 군주 정조대왕. 
수원을 근거지로 구태 정치를 개혁하고자 화성을 쌓고 행궁을 건축했던 임금. 
나이 들어 은퇴한 후에는 수원에 살고자 했던 정조대왕은 1800년에 개혁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1752년에 태어났으니 만48세의 나이였다.  
이후 노론들이 다시 득세를 하게 되고 국운은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100여년 후에는 주변 열강들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결과가 빚어진다.  역사를 가정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만약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나라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김우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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