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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이산과 송연의 사랑, 그리고 이별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2008-06-04 08:10:10최종 업데이트 : 2008-06-04 08:10:1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송연이(의빈 성씨)가 죽다!

"전하! 이제 전하의 곁을 떠나려 하옵니다. 평생 전하와 함께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고 떠납니다."

마침내 드라마 '이산'에서 송연이가 죽었습니다. 정조의 어진을 마무리하고 이제 사랑하는 이의 곁의 떠나 송연이는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이산의 절규는 아직도 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실제 송연 아니 의빈성씨가 죽었을 때 정조의 마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산과 동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오늘은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습니다.
사무실에서 비가 오니 현장이 많은 저의 부서 직원들이 비상근무를 하기로 했고 내일 지방으로 출장갈 인원을 제외하고 저와 제 동료들이 늦은 밤까지 바가 오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이산을 보게 되었고, 아직도 송연이의 죽음 장면에 여운이 남아 글을 올립니다.

정조대왕 이산과 송연의 사랑, 그리고 이별_1
정조대왕 이산과 송연의 사랑, 그리고 이별_1

사실 드라마 이산의 잘못된 점은 너무 정조와 송연이의 러브스토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죠. 물론 드라마라는 것이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시청률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광고가 붙어 이익을 낼 수 있으니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사랑이야기를 질질 끌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이병훈 감독이 만드는 드라마 '이산'은 잘 아시다시피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것으로 철저히 상업적일 수밖에 없으니 정조의 개혁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이藪?이산의 사랑이야기도 역시 중요한 대목이고 해서 늘 송연이 즉 의빈성씨와 정조의 사랑이야기를 즐겁게 보았습니다. 물론 의빈성씨의 본래 이름이 송연이었는지는 어떠한 기록에도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송연이라는 이름이 예쁘기에 계속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조는 효의왕후도 있고, 원빈홍씨 그리고 아주 예쁜 미인 배우가(이름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얼마 전 제가 이 여배우를 보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더니 제 아내가 하늘이 연기가 끝나니 이제 파트너를 바꾸었다고 엄청 혼을 내키더군요. 그냥 혼나면서도 열심히 보았습니다. 
제가 원체 미인을 좋아하거든요) 연기하고 있는 화빈윤씨, 그리고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성빈김씨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박씨도 있었구요.

그런데 정조는 이 여인들을 정말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랑할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정조는 평생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절절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여인들 모두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가문의 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정조는 무척이나 외로운 인물이었지요. 하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에게 굄을 받은 여인은 없다" 여기서 '굄'이란 왕실 용어로 사랑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인은 없다는 뜻이지요. 

여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정조

사실 이 이야기는 송연이 즉 의빈성씨가 죽고나서 한참있다 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여인이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여인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송연이를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을 잠시밖에 하지 못했던 슬픈 국왕 정조와 송연이의 사랑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송연이가 도화서 다모 출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제가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송연이는 바로 정조의 두 번째 후궁이었던 화빈윤씨를 수발하는 나인 출신입니다. 평민의 딸이었던 것이죠. 드라마 상에서 혜경궁이 송연이가 처음 정조의 승은을 받았어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왕비이던 후궁이던 자신을 지원해주는 든든한 가문이 없다면 왕실내에서도 파워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후계자가 여럿 있다면 그 중에서 힘있는 집안 출신의 후궁이 목소리를 높이고 그가 낳은 왕자가 '세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여러군데서 나타납니다. 중종이 경빈박씨를 사랑했고 그의 아들이 후게자로 지목될 수 있었는데 경빈이 평민 출신이어서 세력다툼에 밀려 그의 아들도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경빈 역시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지요.

실제 송연이 즉 의빈성씨는 정조의 승은을 입고 나서도 내명부의 품계를 받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참담한 현실은 혜경궁의 지시에 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 바로 혜경궁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가장 큰 정적으로 나오는 정순왕후는 1777년 경희궁 존현각에서 있었던 정조시해 기도사건으로 당시에 전혀 정치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조의 왕비였던 효의왕후는 아파서 전혀 활동을 못하는 처지였으니 누가 보아도 혜경궁의 지시로 인하여 송연이가 품계를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참고로 하나 말씀 드리자면 중전 효의왕후는 정조와 가례를 올리기 직전에 큰 홍역을 앓게되면서 고질병이 생겨 평생을 병약한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실록에도 성품이 착해서 혜경궁의 사랑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여인들끼리 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로소 아비 호칭을 듣게 되다니..." 아들 얻은 정조 감격


어쨌든 송연이는 화빈윤씨의 처소에서 나인 생활을 하다 후계자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왕실의 지엄한 압력으로 자주 화빈을 찾아왔던 정조의 눈에 들게 됩니다. 보통 국왕은 왕비이던 후궁이던 관계없이 잠자리 즉 合宮을 하게 될 때 그 처소의 나인들에 의하여 옷이 벗겨지고 일(?)이 원만히 치루어지도록 도움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일이 마무리되면 그녀들에 의해 깨끗이 몸이 씻겨지고 옷이 입혀지게 되어있죠. 당시 왕과 왕비 혹은 후궁을 도와주던 나인들이 10명이니 그 중에 한명이 아마도 송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송연이는 화빈윤씨의 처소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으로 궁중 내에서도 좋은 평판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고 화빈의 처소를 드나들던 정조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특별한 가례를 올리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대전으로 불러들여 승은을 입혔을 것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냐하면 정조와 나머지 후궁들은 모두 가례를 올렸는데 송연이 즉 의빈성씨만 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나머지 후궁들이 쟁쟁한 사대부 가문이 뒤에서 받혀주고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면사포도 씌어주었는데 송연이만 그런 아름다운 절차가 없고 더구나 품계도 받지 못했으니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제가 송연이를 보면서 드라마 이산이 자꾸 송연이와의 사랑이야기를 질질 끌어도 꾹 참고 본 것입니다.

송연이는 정조의 희망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1782년 9월 17일입니다. 정조가 국왕으로 재위한 지 6년 되는 해였지요. 이때까지 송연이는 궁인 성씨란 칭호로 불리워졌답니다. 참 슬프죠? 국왕의 자식을 임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4품 숙원의 품계도 받지 못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초라한 집안이었는지 알 수 있죠.

당시 송연이가 낳은 아들이 드라마에서 나온 문효세자이고 정조는 이를 기뻐하면 정3품의 소용(昭容)이라는 품계를 하사합니다. 바로 정2품 소의(昭儀)도 아니고 소용을 준 것을 보니 아직도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날의 '정조실록' 기록을 보면 정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국왕으로서 대단히 점잖은 표현이지만 정조의 언어로서는 가장 기쁘다는 표현입니다. 당시 정조가 31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조선시대로 보아서는 과년한 나이었습니다. 그러니 정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문효세자는 왕실의 보호아래 100일을 넘기게 되었고 비로소 정조는 문효세자의 100일 잔치 후에 송연이를 소용에서 '의빈(宜嬪)'으로 품계를 올려줍니다. '빈(嬪)'이란 정1품이니 왕비 다음으로 높은 품계입니다. 이로써 송연이는 왕실 내에서 원자를 낳은 모후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됩니다.         

아들 문효세자도 죽고 송연도 죽고...슬픔에 잠기다

정조를 비롯한 왕실의 가족 모두에게 사랑을 받던 문효세자는 갑자기 죽게 되고 1786년(정조 10) 윤7월 19일에 장사를 치루게 됩니다. 문효세자는 1786년 5월 3일 갑자기 홍역이 발병합니다. 그전에 명석하고 총명해서 정조와 신하들의 사랑을 받던 문효세자의 발병은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홍역이 발생된 것이 확인되자 의관들이 달려들었고 3일 만에 병이 낳아 정조를 비롯한 신하들 모두가 기뻐하기까지 하였지요.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다시 병이 발병해서 5일만이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데로 3달만인 윤7월 19일에 장사를 치룬 것이지요.

정조의 슬픔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송연이의 슬픔도 극에 달했겠지요. 문효세자가 죽었을 때 송연이는 임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송연이는 문효세자 이후 1784년(정조 8) 윤3월 20일에 딸 한명을 더 낳았었지만 일찍 죽는 슬픔도 겪었습니다.

다행히 1786년에 다시 임신을 해서 정조가 무척이나 기뻐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문효세자가 죽은 것이었고, 정조는 송연이를 통해 새로운 왕자가 탄생되기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송연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1786년(정조 10) 9월 14일이었습니다. 문효세자가 죽은 지 4개월만의 일이었고, 출산 직전이었습니다.

정조가 얼마나 슬퍼하였는지 당시 실록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하고 슬퍼하였다"라고 사관이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국사를 의탁할 데가 없구나"

이 말은 더 이상 왕자를 낳아 줄 사람이 없다는 말과 더불어 왕실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죠. 얼마나 송연이 즉 의빈성씨를 사모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절대고독의 군주 정조, 그가 아무리 자신을 따르는 정약용, 이덕무를 비롯한 학자들이 있다하더라도 11살에 아버지를 여윈 고통과 아버지를 죽이는데 침묵한 어머니 혜경궁으로 인하여 그의 고독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세자가 돌아가신 날인 윤5월 21일, 윤달이 없는 해는 5월 21일을 전후해서 10일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서 홀로 불면의 밤을 보내기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슬프고 고독하게 살던 그에게 마음에 맞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가 채 10년도 같이 살아보지 못하고 이별을 해야 했으니 그의 슬픔은 참으로 깊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늘이 정조의 기쁨을 시기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이산에서 송연의 죽음을 보며 정조의 슬픔을 이해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미스테리...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죽음, 원빈 양자 상계군 담의 음독 자살

그런데 드라마 상에서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송연의 죽음 이후 또 하나의 인물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도 정조와 아주 가까운 인물입니다. 바로 드라마 중반에 나왔던 상계군 담입니다. 
홍국영이 자신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녀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조의 대를 잇는 국본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인물입니다. 
그가 의빈성씨가 죽고 4개월만인 1787년 1월 19일에 자살을 합니다. 실록 기록에 의하면 자살 방법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이지요.

문효세자가 죽고 4개월만에 의빈성씨가 죽고, 의빈성씨가 죽고 4개월 만에 상계군이 죽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1년 안에 이루어진 이들의 죽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정조의 후계 구도와 연관된 문제입니다.

문효세자는 세자였고, 의빈성씨는 임신한 상태였고, 상계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이자 정조의 친 조카로서 만약 정조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후계자로 지목될 0순위의 인물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아서 너무도 중요한 이들이 1년 안에 죽었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하고 무엇인가 음모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정조시대 3대 미스테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송연이 즉 의빈성씨의 죽음에 대해 '정조실록'은 명백히 독살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체로 의빈의 병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기 있었는지 의심하였다"

이 말은 곧 송연이가 독살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간기능 이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독살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죠.

더불어 상계군의 죽음이 독약으로 자살했다고 하는 것인데 반대파가 정조의 후계구도를 막기 위해 상계군을 독약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살했다고 할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 의빈성씨가 죽자 정순왕후는 독살이었다고 단정하고 이를 밝혀달라며 단식투쟁(斷食鬪爭)을 전개합니다. 
오랫동안 왕실에서 죽어지내던 정순왕후가 거꾸로 상계군과 구선복이라고 하는 무반대장이 문효세자와 의빈성씨를 죽이고 상계군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으니 이를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순왕후의 고도의 정치술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일단 단식을 선언한 그녀의 행보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어찌되었던 명분상으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정순대비가 단식을 한다면 이는 국왕 정조가 엄청난 불효(不孝)를 하는 것이기에 유교국가에서 국왕의 지위와 명분이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정순왕후가 상계군을 지목한 것은 정조가 이를 빌미로 상계군을 제가함으로써 정조의 후계자의 한명을 제가하고 후계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어 정조의 정치적 위상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복잡한 상화에서 상계군 역시 의문사하고 정조는 훗날 순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후계자가 없는 불안한 상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글을 오래 쓰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연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보니 상계군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이 내용은 다시 기회가 되면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훗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데 무척이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제 드라마 이산에서 송연이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슬프고 제 큰 아들도 슬픕니다. 하지만 드라마 이산의 마지막 장면에 사자후를 외치는 정조의 모습을 보면서 화요일 이산도 볼 계획입니다.
"내가 화성으로 가서 새로운 개혁을 하리라"
나중에 다시 새로운 글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글:김준혁/수원시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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