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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상)
2008-01-30 11:26:03최종 업데이트 : 2008-01-30 11:26:0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조선왕조 창업 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뒤 궁궐과 각종 관아, 성곽을 조성한 공사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가적 대역사(大役事)였다.  
따라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각종 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우선 성을 쌓을 때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은 물론,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牛馬),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으로부 터 단청, 가마니,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기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물자들이 필요했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상)_1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전도

다행히 화성 축성의 종합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  
<화성성역의궤>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은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추가 지급액 10냥:추가 지급액은 보상비일 듯) 
그렇다면 당시 5칸 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당시의 화폐가 치를 알 수 있다.  

또 쌀 1섬(당시 1섬은 15말)은 5냥 정도였으며, 소는 1마리에 20.35냥, 무 명 1필이 2냥, 숯 1석이 6전3푼, 쇠고기 1근이 5전, 돼지 1마리가 5.34냥이 었다.  
이는 화성을 쌓는데 투입된 경비는 물론 18세기말의 물품 상황과 물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상)_3
축성 때 무거운 석재를 들어 올렸던 거중기

그럼 먼저 화성의 축조에 가장 많이 쓰인 석재는 어떻게 확보되었으며 어 떻게 운반되었는지 알아보자.  
몇년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 의 종합적 검토>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는 화성 축성에 사용된 석재가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 었다고 밝혔다.  

이 돌들은 무게 때문에 멀리서 운반하지 못하고 인근의 △숙지산 △여기산 △팔달산 △권동(서둔동 권동 방죽{*`한국지명총람'에는 서호의 옛 제방 이라고 기록. 그러나 `화성지'에는 `권동제언은 화성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이 맞는다면 권동은 돌산이 있던 화서동 동말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있던 곳, 현재 는 건등이라고 불림)에서 채취해 사용했다.  

숙지산(熟知山:옛지명은 孰知山)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인 데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1796년 1월24일 수 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孰知)? 암묵(暗默)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감탄하 게 된다.  

공석면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고 뒷산이니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 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는 돌을 뜬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들의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 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해도 과 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부석소에서 떠낸 돌은 치석소로 보내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었는데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중.소로 규격화했다.  
이렇게 다듬은 돌은 축성현장으로 옮겨졌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상)_2
화성축성 시 성역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옮기는데 사용했던 대거

돌을 옮기기 위해 우선 정조 대왕의 지시대로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도로를 개설했다.  
돌은 소가 모는 대거(大車: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소 4~8마리 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童車: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 수레를 이용해 날랐으며 썰매(雪馬)를 사용하 기도 했다.  이때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시범 제작해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대거와 썰매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수레를 끄는 소들은 몸집이 크고 다리 힘이 좋으며 체력이 건장해야 했는 데 이를 위해 패장(牌將)을 파견해 각 읍의 장교와 함께 사들이게 했다.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 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 에 소 80마리, 말 252마리가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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