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하)
2008-01-30 11:34:54최종 업데이트 : 2008-01-30 11:34:5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지난 상편에서는 화성 축성에 사용된 물자 중 석재(石材)가 얼마나 들었으며 이를 어떻게 확보했는지에 관해 알아보았다.  
이번 하편에는 목재를 비롯한 철물, 벽돌, 기와, 기타 잡물(雜物) 등의 소요량과 조달방법을 살펴본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하)_1
목재와 석재, 기와 등을 사용한 장안문

먼저 목재는 장안.팔달.화서.창룡문 등 사대문과 동.서장대, 각종 포루와 각루, 포사 등을 건축하는데 이용됐다.  
경기대 조병로 교수(사학과)의 계산에 따르면 목재는 종류에 따라 모두 2 만6천206주가 소요됐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4천902냥5전5푼이었는데 석재가 13만6천960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기둥과 서까래에 사용할 목재의 확보는 화성 축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목재는 충청도의 안면도, 황해도의 장산곶,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와 강 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전라도 좌수영의 순천.광양.흥양.구례.방답진.사도 진, 전라우수영의 자주.진도.장흥.강진.무안.흥덕.김제완도, 경기도의 광주 와 남양, 광평 등에서 베어 들였다.  
이때 나무를 벤 산은 국가의 큰 공사에 사용할 나무를 보호하던 금양처(禁養處), 또는 봉산(封山)이라고 했다. 
임금님의 허락 없이 봉산이나 금양처 의 나무를 벤 자는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하)_2
동복각루(방화수류정>도

이들 목재의 운송은 배나 뗏목을 이용해 이루어졌는데, 충청도나 황해도, 호남의 목재는 각 수영에 딸린 병선(兵船)이나 개인의 어선을 이용했고, 경기도나 강원도의 한강 주변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엮어 운반하다가 바다에서 배로 옮겨 실어 운반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바닷길을 이용해 운반된 목재는 구포(현재 화성시 시화호 연해에 있는 구포리)에 치목소(治木所)를 설치해 다듬은 다음 수원의 화성 공사 현장으로 옮겨졌다.  
구포의 치목소에는 감독과 목수를 파견해 나무를 용도에 맞게 다듬은 다음 수레를 이용해 수원까지 날랐는데 이를 위해 도로를 고치는 등 목재 운송 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나무를 베거나 운반하고 다듬던 사람들에게도 노임이 지급됐는데, 특히 나무를 베는 사람이나 이를 운반하는 사람에게는 나무 한 그루당 1전, 또는 5전씩이 주어졌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석재와 목재말고도 많은 양의 철재(鐵材)가 필요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철재는 모두 55만9천31근9냥3전과 철엽(鐵葉:대문에 붙 이는 쇠 장식으로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만들었다)2천860조각, 기타 연장 류 등이 소용되었는데 이를 금액으로 계산하면 모두 8만6천215냥7전1푼이었 다.  
이 철물들도 목재와 마찬가지로 각 도별로 나누어 구입토록 했으며 일부는 일반 상인들로부터 구입, 배를 통해 운송했다.  

한편 벽돌 및 기와도 많이 소용됐다.  
벽돌은 전국에서 벽돌장들을 수원으로 소집해 임금을 지불하면서 구웠으며 의왕시 백운산 아래 왕륜(旺倫)의 가마에서 굽다가, 후에 화성 북쪽 성(北城)밖, 화성시 정남면 서봉산의 서봉동(棲鳳洞) 등에 가마를 새로 설치, 모두 3곳에서 제작했다.  
축성에 사용된 벽돌을 제작하는데는 2만6천577냥1전5푼의 비용이 들었다.  
기와 역시 왕륜과 서봉, 사관평(肆觀坪:사근평)의 가마에서 제작했으며 제작비용은 6천198냥3전6푼이었다.  
벽돌과 가마 굽는 데 사용한 땔나무는 인근 개인 소유 산에서 돈을 주고 구입했다.  
화성 축성, 물자 어떻게 확보했나(하)_3
성곽 세부구조도

기타 물자로는 숯과 석회, 단청, 지필묵, 기타 잡물 등이 있었다.  
숯은 모두 6만9천56가마로 지평, 광주, 용인에서 사들였다.  
석회는 경기도 파주와 풍덕, 수원의 어랑천, 충청도의 평신진에서 구웠으며, 황해도 금천에서도 많은 양의 석회가 배를 통해 수원으로 수송됐다.  

종이는 대부분 서울의 종이전에서 사들였으나 정조 19년(1795) 광교동 입 구(연무동)에 지소(紙所)를 설치하고 종이제조 기술이 있는 승려를 모아 제작했다. 
연무동 수원여객 버스 종점 부근을 지금도 `지소', `지쇄'라고 하 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밖의 잡물(雜物)은 전편에서 밝힌 것처럼 그 종류와 수량이 너무 다양하고 많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소가죽 1천870장, 가마니 5만9천600닢, 새끼 39만1 천986발, 동아줄용 삶은 마 6천75근, 돌 운반용 생칡 2천852동이49근, 땔나 무 10만8천432단, 볏짚 24만2천284단, 숫돌 74덩이, 크고 작은 솥 86개, 큰 독 71개 등 140여 종류로 잡물 총 구입비는 12만3천744냥 1전 4푼이었다.  
물론 이 세세한 기록들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김우영 주간〉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