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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축성과 배경
2008-01-02 18:55:53최종 업데이트 : 2008-01-02 18:55:5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 정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보다 5년 앞선 정조 13년(1789) 국왕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원(영우원)이 양주군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서 지금의 융릉(현륭원)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용주사를 세워 아버지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주는 원찰로 삼게 된다.
  
그러나 국왕 정조가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묘원 자리 바로 앞에 수원부의 관아가 자리해 있었고, 많은 주민이 묘원 근처에 살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지 관아와 주민을 이주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또 만만치 않은 이주비용도 문제였다. 어디로 어떻게 이주시켜야 할 것인가. 
  
현륭원 자리를 고를 때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골라 놓은 효종의 능침 후보 자리를 선정하였듯이, 원찰로 세운 용주사가 갈양사의 옛 터전이었듯이, 이 문제도 선인들의 견해가 반영되었다. 바로 조선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더 큰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20리 쯤을 북상한 팔달산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팔달산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삼으면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마땅히 큰 도시로 발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정조는 훌륭한 묘원 자리를 추천해 놓은 고산 윤선도와 새 수원의 터전을 골라놓은 반계 유형원의 벼슬을 추증해주고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새 수원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관아를 옮겨오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큰 돈이 들었다.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가옥 보상비와 위로금까지 주었지만 그래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새 수원을 건설하는 데 삼사년이 흘렀다.
  
정조 17년(1793) 정조는 아버지의 원침이 있는 수원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름도 화성유수부로 개명했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남쪽의 광주에 이어 서울을 남쪽에서 보위하는 또 하나의 유수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새 도시 수원을 에워쌀 화성의 건설을 계획한다. 국내외 여러 성들을 비교 분석하여 장점과 단점을 도출해내고 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최고의 성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화성의 건설은 정조 18년(1794) 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정조 20년(1796) 9월 10일 끝나게 된다. 4600보에 이르는 화성과, 화성의 핵심인 행궁(576칸)의 건설까지 마쳤던 것인데, 중간의 공사 중지 기간을 빼면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다. <화성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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