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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화성을 쌓았을까?
축성 동기
2008-01-02 19:23:47최종 업데이트 : 2008-01-02 19:23:4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이 스며있는 문화유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조대왕은 부친 사도세자에게로 향한 효심 때문에 수원 땅 에 전국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을 짓고 화성을 축성했다고 한다. 

즉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임금의 능행차 대열이 묵어갈 화성행궁이 세워졌고, 수원이라는 신도시와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조대왕의 효심은 '출천지효(出天之孝)'라고 할 만큼 지극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사도세자의 능을 지키던 능참봉이 '어렵사리 능참봉 자리 하나 얻었더니 임금님 행차가 한달에 스물아홉번이더라'고 한탄을 했다는 전설까지 내려올까?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능침을 이곳 화산(융릉, 건릉)으로 옮기고 자주 참배 를 하러 행차를 했다. 그리곤 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내려 올 줄을 몰랐다고 한다. 
너무 울어서 눈에 피눈물이 흘러 내렸고, 탈진 상태에 이른 임금을 노정승 채제공이 업고 내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하긴 정조대왕의 나이 열한살에 목격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은 평생의 한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꼭 효심 하나 때문이었을까? 
효심 하나만으로 옛수원 땅에 아버지의 능을 옮기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현재의 수원 땅으로 이주케 했을까? 더욱이 국가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신도시와 화성을 건설하는가 하면, 전국 최대 규모 의 행궁 등을 축조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우리시 학예연구사 이달호씨(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는,"화성의 축성 동 기에는 정조대왕 의 효심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노론으로 대표되던 수구 집권세력 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이상이 담긴 새로운 개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고 말한다. 

서울대 한영우교수도 "화성 건설의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 덤을 정조 13년 (1789)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자 주 참배하여 효 성을 다하기 위함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 치했으며, 서울과 화성 사이에 신작로를 개설했다. 또 화성에서 주요 정사를 집행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여러 가지 정치적인 목적이 복합돼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 광해군 14~현종14)은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수원이 대도시가 번창할 곳으로 예견했다. 
반계는 역대 문헌과 사상가의 견해를 자세히 고증하고 현실에 근거한 실사 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함)의 방법론과 개혁사상을 펼친 인물로 '실학 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의 주장은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이 되었으며 후세의 실학자 성호 이익, 안정복 등으로 이어진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뒤 에 다산 정약용 등에까지 미쳐 실학이 집대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계수록'은 말로만 수필의 형식이지, 사실은 정치·경제·군사·정부 등 국가 전체 제도 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총체적인 개혁안인 것이다. 

정조대왕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세력인 노론 벽파에 맞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세력으로 개혁적 성향의 실학파가 많이 포함된 남인들을 선호했다. 
따라서 화성 축성 공사 때 남인·실학자들이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 한영우 교수도 밝혔지만 정조대왕은 단순히 효성 때문에 '성곽의 꽃'이라고 일컫는 화성을 건설하지 않았다. 이는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최정예부대인 장용외영을 수원에 설치한 것을 비롯해 최대 규모의 행궁을 짓고 신도시의 상업진흥과 인구 증대에 크게 신경을 쓰는 등 수원을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정조대왕으로서는 뿌리깊은 정치세력인 노론들이 대거 살고 있는 서울에서 새로운 정치 개혁을 펼치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을 선택하게 되고 여기에서 젊고 개혁적인 남인·실학자들과 어울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일 게다. 

학자들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서울에서 하지 않고 굳이 수원에 내려와 서 온 나라가 떠 들썩하도록 성대하게 치렀던 것은 이런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 능행차를 하면서 백성의 민원을 직접 듣는 격쟁(擊錚)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시킴으로써 노론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신임을 얻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는 추론(推論)도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정조대왕은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초대 유수로 남인의 지도자이자 영의정인 채제공을 임명할 정도로 이곳에 쏟는 애정이 컸으며, 능행차 때는 수원에서 문·무과 과거시험을 실시해 인재를 뽑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정조대왕은 왕위를 내놓은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화성행궁의 '노래당(老來堂)' 이니 '미로한정(未老閒亭)' 같은 건물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은 1800년 대왕의 서거 이후 노론에 의한 대대적인 남인 박해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조와 화성이 역사·문화 ·예술·관광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정조의 효심과 개혁정신으로 축성한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으로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에 의해 파괴됐던 화성행궁은 이제 복원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머지 않아 일부를 제외한 전 시설들이 웅자(雄姿)를 드러낸다. 

수원에서 정조대왕의 정신은 다시 부활하고 있다. <김우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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