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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담긴 조선의 정수
2008-01-02 19:37:36최종 업데이트 : 2008-01-02 19:37:3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화성의 축성과 배경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 정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보다 5년 앞선 정조 13년(1789) 국왕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원(영우원)이 양주군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서 지금의 융릉(현륭원)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용주사를 세워 아버지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주는 원찰로 삼게 된다.
그러나 국왕 정조가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묘원 자리 바로 앞에 수원부의 관아가 자리해 있었고, 많은 주민이 묘원 근처에 살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지 관아와 주민을 이주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또 만만치 않은 이주 비용도 문제였다. 어디로 어떻게 이주시켜야 할 것인가.
현륭원 자리를 고를 때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골라 놓은 효종의 능침 후보 자리를 선정하였듯이, 또 원찰로 세운 용주사가 갈양사의 옛 터전이었듯이, 이 문제도 선인들의 견해가 반영되었다. 바로 조선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더 큰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20리 쯤을 북상한 팔달산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팔달산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삼으면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마땅히 큰 도시로 발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정조는 훌륭한 묘원 자리를 추천해 놓은 고산 윤선도와 새수원의 터전을 골라놓은 반계 유형원의 벼슬을 추증해 주고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새수원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관아를 옮겨오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큰 돈이 들었다.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가옥 보상비와 위로금까지 주었지만 그래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새수원을 건설하는 데 삼사년이 흘렀다.
정조 17년(1793) 정조는 아버지의 원침이 있는 수원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름도 화성유수부로 개명했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남쪽의 광주에 이어 서울을 남쪽에서 보위하는 또 하나의 유수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새도시 수원을 에워쌀 화성의 건설을 계획한다. 국내외 여러 성들을 비교 분석하여 장점과 단점을 도출해내고 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최고의 성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화성의 건설은 정조 18년(1794) 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정조 20년(1796) 9월 10일 끝나게 된다. 4600보에 이르는 화성과, 화성의 핵심인 행궁(576칸)의 건설까지 마쳤던 것인데, 중간의 공사 중지 기간을 빼면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다.

계획된 신도시 수원

손정목씨는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라는 저서에서 지금의 수원을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고 규정하였다. 그것도 농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한 자족적인 도시로서 신도시가 지녀야 할 요건을 모두 충족한 모범 도시라고 했다.
정조는 새수원을 건설하면서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라.'(戶戶富實, 人人和樂)고 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의 신도시에 대입해도 좋은 말이다. 물리적인 도시 계획에 앞서 이념적으로 정리해야 할 바탕인데 새수원 건설의 배경은 이렇듯 훌륭하였다.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정조는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저수지 아래 땅을 개간, 대유둔이라는 국영 농장을 두어 화성을 지키는 기본이 되게 하였다. 또, 상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인삼. 관모 등의 독점 판매권을 수원의 상인들에게 주었다. 정조는 새수원을 자신의 아버지 묘원이 있는 고향으로 생각하였고, 당 시대의 역량을 모두 모아서 눈에 보이는 화성과 보이지 않는 화성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실학의 도시 화성

새수원은 출발부터 실학과 연결된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 사상이 새수원의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더구나 시대적인 흐름은 실학 정신을 현실에 투입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또한 상업과 농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 구조의 재편성은, 그때까지 조선을 이끌어왔던 성리학을 지극히 공리공담적인 구학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정조는 아마 화성을 조선 실학의 실습장으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의 통치 전반에 활용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부류의 반대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걸림돌이다. 또 기득권층의 저항도 충분히 예상된다. 이 모두를 피해가면서 현실에 적응시키는 방법으로도 화성을 건설했을 것이다.
기계나 기구의 개발과 활용은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경비를 절감하면서 공역 기간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성을 위한 화성

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 그리고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주고,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은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새수원의 건설 계획에는 성의 축조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국고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고의 손실보다 수원 주민을 우선했다는 말이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정조는 화성 성역에 참여하고 있는 공역자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척서단滌署丹을 지어 하사한다. 더위 먹은 데 먹는 환약을 특별히 지어 내려준 것이다. 약을 지급 받은 사람들은 약의 효능보다 국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은 곧 최고의 성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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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특성

화성은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된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고, 적재적소에 치성을 두었으며, 여장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를 동서에 건설했다.
치성(雉城)의 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치성은 성벽을 중간중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은 감추고 남을 잘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치성이 없거나 적당한 장소에 있지 않으면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하기 쉽다. 과거의 성들에도 치성이 있지만 그 활용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화성에 건설된 치성들은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순수하게 치성의 역할만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를 겸하거나, 치성 위에 집을 지어 군사를 보호하려고 한 포루鋪樓도 있다.
성의 동남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는 모두 각루角樓를 두었다. 이는 화성의 다섯 군영 체제를 보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행궁에 중영中營(신풍위新風衛)을 두고 동에는 창룡위蒼龍衛, 서에는 화서위華西衛, 남에는 팔달위八達衛, 북에는 장안위長安衛를 두었는데, 중간의 요소에 네 각루를 두어 각 위衛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부장副將이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각 각루의 위치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휴식 공간으로써의 역할도 컸다고 보여진다. 그 중 제일은 동북각루인데 용두각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정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만한 정자인데 동북각루라는 집 이름이 말해주듯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다. 적군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 밑의 총구와 포구에서는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화성 봉돈烽墩은 단순한 봉수대의 역할을 뛰어넘은 요새다. 우선 봉돈 자체가 하나의 치성으로 쓰이며, 많은 총구를 뚫어 자체 방어력을 갖추었으며, 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며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화성의 건설에서 벽돌의 사용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의 제도를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이 화성에 담겨 있다. 성의 중요 시설물은 대개 벽돌을 활용하였고, 건축물의 일부분도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화성을 축성 재료로 분류할 때 다른 곳에는 없는 석전교축石塼交築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화성의 평면은 나뭇잎을 닮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순응하며 성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애민정신에 의한 성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완벽하게 나뭇잎을 닮았다.
화성은 여러 기능들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있게 된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된 것이다.

공사 실명제의 완벽한 구현

화성의 건설은 완벽한 실명제로 완성된다. 성역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보고서의 간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성의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정조19년(1795) 윤 2월에 수원에서는 커다란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잔치의 모든 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정조는 국가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정리해 놓을 요량으로 정리의궤청을 설치하였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간행은 화성성역 공사보고서의 간행에 본보기가 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는 공사의 논의 과정과 관청 사이에 주고 받은 공문서, 임금의 의견과 명령 등 진행 과정을 기록했고,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및 비용들을 낱낱이 실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몇 일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어느 시설물이든지 건축 자재를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비용을 산출했으며 성 안팎에서 본 그림을 따로 그려 이해를 도왔는데 부득이한 경우엔 실내의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기계들은 부품까지 따로 그려서 설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 공사보고서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지난 70년대 화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분적인 보수를 해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화성성역의궤가 교과서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화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화성성역의궤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200여년 전의 완벽한 공사보고서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들어 있는 실명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실명판을 볼 수 있는데 화서문 것은 마모가 심해서 눈을 씻고 들여다 봐야 볼 수 있지만, 창룡문과 팔달문의 실명판은 선명하게 보인다. 그중에서 팔달문 것은 마치 어제 새긴 듯 글씨가 살아 있다. 최근에 일어난 부실 공사들과 비교해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화성의 건설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곧, 정조를 비롯한 당시 정치가들의 자신감 있는 국정 수행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그 당당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는 당연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꼼꼼한 성역 관리와 공사 경영

화성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관리와 경영의 능력이다. 오백 칸이 넘는 행궁을 건설하면서 십리에 이르는 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더구나 28개월 만에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국왕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공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대의 기술력과 관리. 경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금전 관리를 엄격히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당으로 인건비를 주는 경우와 일의 성과에 의해 돈을 주는 성과급제를 병행하였다. 혹시라도 빈틈으로 경비가 빠져나가는 것을 예방하고 작업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이 배제된 경영과 관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 개인의 욕심이 끼어 들 틈이 보이는 것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깨끗한 경영과 엄격한 관리로 쌓았기 때문에 화성은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곽의 꽃, 조선의 꽃

화성은 조선의 절정기에 탄생한다. 그 시작은 비운에 죽은 사도세자의 묘원을 옮기는 것으로 비롯되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세계인이 즐겨 찾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발전, 심화, 절정, 쇠퇴라는 곡선을 그리면서 역사는 흐른다. 화성의 건설 이후로 보이는 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쇠퇴는, 거꾸로 화성을 극점에 올려놓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화성은 조선의 꽃이요,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도 제대로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래서 자명해진다. 이 아름다운 화성을 어떻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화성에 서려 있는 소중한 정신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으로 만들 것인가.
화성을 건설한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잘 지키고 가꾼 오늘날의 우리들도 훌륭했다고, 이백년 후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글. 염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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