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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수원사랑
2008-01-02 19:46:04최종 업데이트 : 2008-01-02 19:46:0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지난번에 쓴 '왜 화성을 쌓았을까' 편에서도 언급 됐지만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수원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지난 번 글을 쓰고 난 뒤 수원시 학예연구사 이달호 씨는 위에 열거한 이유 외에도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가 배봉산에 위치해 있었을 때 정조의 5 세 된 왕세자가 돌림병으로 죽어 후사(後嗣)가 끊겼고, 곧이어 잉태 중이던 세자의 어머니마저 비명에 간 비극을 겪었으나 △현재의 위치인 화산으로 이 장하고 난 뒤 국가 최대의 경사인 왕손(후에 순조)을 낳았다는 것을 수원 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요인으로 들었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최근 '조선 후기 향토사회연구'와 '조선시대 지방사 연구'라는 역작 두권 을 한꺼번에 펴낸 최홍규 교수(경기대 사학과)의 전기한 저서에 따르면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 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 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 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 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 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 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장안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 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정조실록의 기록도 있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라고 최교수는 주장한다. 
이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에만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 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은 이렇듯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다. <김우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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